2천 년 동안의 고독-예수,부활하다.그리고 교회가 되다
돌이켜보면 성경의 복음서 자체에 나타나는 예수의 부활에도 어딘지 미심쩍은,그리고 색다른 구석이 있었다.예의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는 부활한 예수의 장면에서,누가복음의 편저자는 예수가 '다른 모습'이었다고 서술한다.살아있을 때와는 뭔가 달라진 모습이었다는 뜻이다.또 비어 있던 무덤 주위에서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는,'자신을 만지지 말라'고 말한다.만져서는 안되는 뭔가 변화된 존재라는 얘기를 그는 하고 있는 것이다.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에게 나타난 예수 역시 모습이 아닌 소리로만 존재한다.강렬한 빛과 같은 존재로 묘사된 예수는 사도 바울의 눈을 멀게 한다.그리고 이 예수 역시 평범한 육신부활의 예수가 아니다.
이런 여러 에피소드들에 나타난 부활 이후의 예수는 뭔가 다른 존재로 변화한 예수다.다시 말해 부활한 예수의 육신은 죽기 전의 예수의 육신과는 뭔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이 이 서술들의 공통된 지적인 것이다.물론 이 이야기들 속에는 한번 죽은 후의 육신은 죽기 전의 그것과는 당연히 달라야 한다는,문학창작적 본능과 내세에 대한 자연스런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그러나 또 한 가지,부활이란 예수만이 아닌 기독교 신자 개개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는,신자들 역시 무언가 예수처럼 '다른 존재'로 변화되어야 한다는,그것도 내세가 아닌 지금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세에서 그렇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신앙관의 변화 조짐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존재에의 열망,신적인 것에 대한 갈구가, '다른 존재'로 표현되는 예수의 모습에서 미약하나마 엿보이는 것이다.죽은 후에나 가능한 인격 변화는 별로 소용이 없고,살아있는 그 때 존재 자체가 변화할 수 있어야 진정한 신앙이라는 또다른 의식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모든 대중이 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정진하고 노력하는 소수만이 그런 존재로의 변화가 가능하다는 엘리트 의식이 이런 신앙 안에 자리잡고 있었고,따라서 이런 신앙은 대집단이 아닌 소집단 그리고 개인적인 레벨의 신앙들로 분류될 수 있었다.
그들이 추구하고 있던 것은 근본적인 깨달음이었고,꿈과 환각과 철저한 사유와 금욕과 명상을 통해 그런 경지로 나아가길 힘썼다.영지주의자들을 포함하는 이 사유의 그룹들은 그들의 신념과 신앙형태 때문에 당시 기독교 내부에서 교권을 잡고 있던 교부들에게 냉소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교부들의 가르침을 '믿기만 하면' ,근원적인 구원을 성취하게 된다는 정통 기독교의 논리를 한심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다시 말 할 필요도 없었다.스스로의 노력,스스로의 지적 고투와는 거리가 먼 이런 종류의 반복식 주입학습에 대해서 그들은 정통 기독교를 거의 하등한 종교로까지 생각했다.
반면 사도 바울은 좀 더 모호한 스탠스를 취했다.(정확히 말하자면 바울은 이런 논쟁이 벌어진 때 보다 훨씬 이전에 살았던 사람이다 ) 그는 예수의 육신 부활을 인정하면서도 신자 개개인의 종교적 각성 또한 함께 요구했다.그는 신자들에게 보낸 몇몇 서한에서,'거듭남' ,'옛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라','새로운 피조물' 과 같은 단어들을 강조하며 부활의 현세적 의미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게다가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났던 경험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갑작스럽게 눈이 먼 상태에서 예수의 목소리를 듣는다.일부 의사들은 여기에서 환청과 환각,심지어는 간질 발작을 읽어낸다 - 은 분명한 환상과 무아경 속에서 였다.
그것은 감각적 경험이었으며,환상과 내적 경험을 통해 세계의 본질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정신적 아웃사이더들의 전형적인 언술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예를 들어 윌리엄 블레이크..) 심지어 그는 자신의 환상 속에서 천계적 공간을 헤매기도 했다.그는 자신이 세번째 하늘까지 올라간 적이 있다고 주장했으며,이런 비결을 경험했다는 그의 이런 얘기들은 그가 일정한 네임밸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자칫 이상한 이단자 쪽으로 몰리기 십상인 발언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실을 잊지 않았다.초기 기독교 전체의 부흥에 걸맞는 이론적인 초석을 준비해야 했으므로,결코 '대중'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그래서 그는 가끔 교리의 도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당시 사회와 교회 커뮤니티의 성차별적인 측면을 지지했으며 교회의 단합을 해치는 '개인적 신앙행위'들을 규탄할 수 밖에 없었다.그 역시 예수의 육신 부활을 지지했다.그러나 사도 바울은 결국 예수의 적통을 이어받지 못했다.나는 그 이유가 부활의 형태에 대한 그의 미심쩍은 태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적자는 결국 부활을 확고하게 주장했으며 부활한 예수를 만났으며 그에게 직접 왕관을 부여받은 베드로로 결정됐다.4복음서 중 마태와 누가와 요한의 복음서가 베드로를 예수의 후계자로 지명한다.마태복음은 예수가 그를 '반석'이라고 불렀다고 서술한다.그러나 여기서의 반석은 신앙의 기초로서의 반석이 아니라 교회의 정통성이라는 의미에서의 반석이다.누가복음은 '주께서 살아나시어 시몬(베드로) 앞에 모습을 보이셨다'는 말을 제자들이 전해들었다고 주장한다.요한복음은 특유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데,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양을 돌보는 목자'의 역할을 대신하라고 했다고 얘기한다.
'양을 돌보는 목자'.교회를 다녀본 사람이라면 굉장히 익숙한 내용이자 어디서 많이 들어본 표현일 것이다.'돌본다'.'목자',이 표현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쓰여지는 표현들이다.즉 기독교의 성직자들,주교와 사제와 부제들은 예수의 직접적인 후계자인 베드로의 후예들이라고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며,이런 엄격한 규정에 따라 평신도들은 교회 내 계급제도의 가장 하위 단계로 편입되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의 직접증거자이자 지명후계자로 베드로가 결정되고,베드로의 그러한 위치와 의미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교회의 이런 놀라운 정치적 구조 활용은 신학과 신앙생활의 명령계통을 확립시켰고,주교-사제-부제-평신도로 이어지는 피라미드식 교회 내부구조를 피할 수 없는 예수의 지상명령처럼 포장했다.이런 폐쇄적인 명령구조는 우선,신앙에 관한 다른 논리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억압했다.이 구조는 기본적으로 로마제국의 지배구조를 닮아있었고,제국의 그 어떤 것에도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비슷한 역학적 구조를 가진 좀 더 큰 구조에게 작은 구조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했고,로마제국이 기독교를 자신들의 종교로 공인시키게 된 데에도,기독교 교회가 유지하는 정치구조의 근본적인 불관용성과 폐쇄성과 확실한 위계질서에 본능적인 친밀감을 느껴서였는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철학과 논리의 오리지널 디자이너이면서도 - 그는 저작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다 - 기독교 권력구조의 정통성에서 배제되는 운명에 처했던 것은,그가 부활한 예수를 직접 만나본 경험이 없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역으로 말하자면 기독교 교회의 권력 구조는 바로 부활이라는 사건의 해석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육체적 부활에 의문을 품은 모든 사변적 그룹들이 정통 기독교에서 밀려나 마이너 리그로 사라져갔고,대중들의 수준에 가장 적당하고 그들의 기호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들이 기독교의 교권을 잡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그들은 결국 자신을 지지해준 교인들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그들을 압제했고,서양문명의 정신사는 암흑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예수의 부활로부터 비롯되었다.예수의 부활은 교권이 되었고,부활의 모든 다른의미들은 사장되었다.예수는 살아서도 또 죽어서도,그리고 죽었다 다시 살아나서도 영원한 고독 속에 놓일 수 밖에 없는 역사상 가장 희한한 인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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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수의 부활이 가지는 여러가지 의미와 반응들을 떠나서,우리는 종교 용어로 사용되는 부활이라는 단어의 또다른 의미들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다.즉 자신의 현존재를 무의미함,모순,혼란으로 보고,그 부정적인 내적 존재들을 의미있음,질서,지혜와 같은 조화로운 다른 존재들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인간의 근원적인 열망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부활일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심층 내에서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변신에의 의지와 상통하며,그것이 종교와 같은 내적 시스템과 연관될 때,좀 더 고차원적인 어떤 것,자기 영혼의 충일함,그리고 정신의 만족감으로부터 비롯되는 행복하다는 심정,그리고 스스로의 고양을 요구하는 인간 내부의 어떤 원동력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부활은 우리의 원초적인 인간성을 우리 스스로가 신뢰할 수 있다는 낙천성과도 연관이 있다.지금은 비록 전락했고 본래의 궤도에서 벗어난 혼란스러운 존재이지만.'부활' 과 같은 동력원으로서의 과정을 통해 언젠가는 우리의 좋았던 인간성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서,부활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어질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좋았던 인간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파악되느냐에 따라,우리 스스로의 종교적 원천의 구조 역시 판이하게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지게 될 수 밖에 없다.현세에서의 소유와 욕망과 자본과 권력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은 결코 스스로의 부활을 '현세'에 둘 수 없다.소유의 성취와 욕망의 충족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습성이 아니고,또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기 때문이다.(종교는 그래도 일말의 양심 정도는 필요로 한다)
자,우리가 익히 잘 아는 어떤 교회의 장로님이 있다고 하자.그의 인생 목표는 그냥 돈이다.돈을 벌어서 자본을 축적하고 일차적으로는 자신의 직계 후손에게,그리고 순차적으로는 자신과 이익을 공유하는 동지들에게 그 자본의 세례를 맛보게 하는 것이 그의 일차적인 삶의 목표라고 치자.
물론 그는 돈만이 자신의 목표라는 사실을 적어도 겉으로는 부인할런지도 모른다.자신이 다른 목표들을 위해서 돈을 모으고 있노라고 항변할런지도 모른다.그 다른 목표들이라는 것은 대개 개인의 그림자 보다는 더 큰 영역 - 뭐,국가경제랄지 공동체의 번영이랄지 주님의 뜻을 위해서랄지 - 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되기 때문에,스스로도 스스로에 의하여 기만당하고 있을 가능성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그래도 그의 종교는 역시 돈이다.결국 자신이 자신의 최우선가치를 두는 것이 그의 종교일 가능성이 높고,그 가치라는 것은 그의 정신력과 일상적인 행동으로부터 적나라하게 표현되어지고야 마는 것이다.감추기가 어렵다.특히 돈이 이슈가 될 때에는 은폐 가능성 역시 매우 작아지기 때문에,그 성향은 그야말로 백일하에 드러날 수 밖에 없다.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부활을 결코 '지금 이 시기'로 설정해놓을 수 없다.언제나 결정적인 존재의 부활은 삶의 마지막 시기이거나 사후의 부활 - 존재의 결정적인 변화 - 에 타이밍을 맞추어 놓을 수 밖에 없다.지금 - 현세에서는 스스로의 욕망과 축적이 더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존재의 보장으로서의 종교 역시 필요로 하기 때문에 - 만약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 최대 이벤트인 부활을 될 수 있으면 뒤로 미루어놓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반면 부활의 시기 - 인간성 회복의 시기 -를 '지금 이 때'로 설정해놓은 사람들은 조금은 다른 종교적 성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그 중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로 깊숙히 파고 들어가 존재의 시원을 향해,사색이라는 열정을 통해 접근할 것이다.그리고 그는 아마 자신의 여정과 자신의 개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겠지만,거기에 복잡다기한 용어를 붙여가며 요란 섞인 전시회를 열 것 같지는 않다.그는 자기 안의 빛을 과시와 소유의 방편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깊은 침묵으로써,인간이 가지는 은근한 신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역시 인간의 부활이 '지금 이 때 '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면 보다는 바깥의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눈을 돌리게 될 것이다.그들에게 부활이란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공유되어야 할 어떤 것이며,그것이 예수 정신의 진정한 부활이라고 여겨진다.그들은 예수의 삶에서 드러났던 또 한 부분,그의 강건한 윤리적 정신을 바라보며,부활의 개념 역시 그곳에 두게 된다.
이렇게..예수의 부활은 여러가지 사건과 반응을 낳았다.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드러난다.그리고 그 태도가 예수를 여전히 죽음의 암흑에 유폐시키느냐,아니면 그를 진정한 부활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예수는 그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의하여 부활하는 것이다.그는 여전히 죽어있을 수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도 있는 탄력성 만빵의 캐릭터 임에 틀림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