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

2천 년 동안의 고독-예수의 탄생.

폴사이먼 2011. 7. 20. 09:54

먼저,그의 탄생.

 

신약성경의 몇몇 복음서는 그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으나,사실 그의 탄생지는 나자렛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강력한 반론이 있다.그러나  어떤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런 문제에 증거를 찾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모든 것은 추측이다)

 

그가 태어나던 날의 밤하늘에는 커다란 별이 떠올랐고,그 별의 궤적을 따라 동방의 세 현자 또는 마법사들이 베들레헴의 마굿간 -예수의 어머니는 도피 여정 도중 예수를 마굿간에서 급하게 출산했던 것으로 묘사된다-으로 찾아와 경배하고 일련의 선물 꾸러미를 놓아두고 떠난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동방의 현자들을 당시의 지배자 헤롯 왕과 만나게 함으로써,나쁜 옛 왕과 좋은 미래 왕의 구도를 슬쩍 끼워넣는다.뭐,이런 얘기는 무척 익숙하다.옛날 옛날 어린 시절 교회를 다녀보았던 사람이라면 크리스마스 날 주일학교의 어린 아이들이 상연하는 연극의 단골 레퍼토리를 통해 예수 탄생 날의 사연을 잘 알고 있다.또 그 연극의 천편일률의 대본과,크리스마스의 춥고 환상적이며 동화적인 분위기,대부분의 아이들이 처음으로 경험했던 '스스로 해냈던 첫번째 창작물'인 그 연극의 기쁨이,이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논의 불가능한 지점으로 밀어넣는다.

 

지금은 분명히 산타클로스와 루돌프 사슴이 우위에 있는 듯 보이지만,과거엔 크리스마스 카드를 장식하는 삽화 역시 바로 이 장면,젊고 겸손하고 순결해보이는 부부와 순한 가축들의 호기심어린 눈망울이 모여든 마굿간 배경,여물통 내지 엄마 품에 누워 새근새근 잠든 아기 -아기들의 모습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안도감과 행복감을 가져다 준다-의 모습 역시 그 인기가 만만치 않았었다.

 

예수를 둘러싼 많은 진실은 바로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첩첩이 쌓인 관례와 고정관념들,익숙한 이미지들과 ,좀 더 나아가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사탄으로 몰아가는 이단 만들기와 협박들을 통해 짜여진다.많은 부분에서 허술하기 그지없는 예수에 관한 어떤 이야기들이 대세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이 종교가 오랫동안 서양문명을 지배해왔다는 분명한 사실과,그 이어온 '시간들'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예수의 출생지 따위가 그렇게 중요할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문제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임이 확실해 보인다.그러나 2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매우 중요했다.그들은 그들의 선지자이자 구세주를 나자렛 같은 역사와 현실의 비중이 덜 한 동네에서 태어나게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들에겐 강력한 배경이 필요했고,그래서 선택된 장소가 바로 옛 이스라엘의 황금기의 시작을 이끈 왕 다윗의 출생지 베들레헴이었을 것이다.구약의 예언 성취와 운을 맞춰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작가들과 그들이 창작 기반으로 삼은 구전된 이야기들은,여러가지의 문학적 창작들 -헤롯왕의 아기 예수에 대한 추격과 요셉과 마리아의 이집트로의 피신,그리고 그들의 경유지로서의 베들레헴 같은-을 첨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이런 극적 장치들 없이는 예수가 베들레헴 출생이라는 것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은,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가 베들레헴이 아니라 다른 지역 태생이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유대 민족의 옛 경전인 구약성서의 예언들에 대한 강력한 인식과 -당연히 기독교는 유대 민족으로부터 출발했다.그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다시 말해 예수는 유대인이다.- 부담감 때문에,예수의 탄생 설화를 만든 사람들은 이런 문학적 창작과 짜맞추기를 단행했을 것이다.그들이 사기를 쳤다는 것이 아니다.그들에겐 그런 의식 조차 없었을 것이다.당연하다는 듯 이런 일을 저질렀을 것이다.

 

물론 예수 사후 몇 십 년간 살았으며 예수의 삶과 중요한 관련을 맺었던 사람들은 예수의 출생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겠지만,그 시절은 지금처럼 기록과 증언이 문서로 남는 시대가 아니었다.메시아에 대한 강한 열망,그리고 그 메시아는 반드시 구약의 예언과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진실을 삼켜버렸을 것이다.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이해가능한 일이다.물 위에 나뭇잎으로 배를 띄운다는 20세기의 혁명가이자 장군도 있는데 출생지 변조 쯤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굳이 그의 탄생 설화에 '현자들을 인도하는 별'을 추가한 것에도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하다.거대한 위인의 탄생엔 언제나 천계의 변화가 동반된다는 일반적인 경험칙을 지적할 수도 있다.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이례적인 자연현상에 몹시도 민감하니까 말이다.더구나 별과 우주는 점성학,그리고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각종 초자연적인 생각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이것도 충분히 이해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해 외에도 베들레헴의 별에는 또다른 이해가 있을 수 있다.당시 명실상부한 서양 세계의 지배자인 로마 황제 시저에 대한 반발로 별을 동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 것이다.당시의 시저를 상징하는 별,로마에서 주조한 동전에 새겨진 로마 황제의 별에 대한 반항으로,예수 탄생 이야기에 유다의 별이 설정되었을 가설도 있다.가능한 일이다.아니라고는 말 못한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어떤 사람들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아주 하챦은 일일 것이다.도대체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든 나자렛에서 태어났든 아니면 어디 카이로에서 태어났든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사실이란 말인가.약속과 예언 성취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야 중차대한 문제였을 수도 있겠지만,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따위 문제가 뭐 그리 중요하냐는 볼멘 소리도 가능한 것이다.

 

맞다.당연하다.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그렇다면 2천 년 전의 베들레헴 상공에 커다란 별이 떴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역계산과 오래된 성도들을 훑어보고 있는 학자들이야말로 얼마나 불가해한 존재들인가.그들의 가상한 노력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큰 별이 어느 날 밤 하늘에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낭만적인 에피소드이지만,그 사실이 예수 존재의 또다른 가능성 하나를 보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이다.

 

반면,예수가 하필 마굿간(외양간인가?) 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정처없는 도피 중에 가축 우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조금 이색적이다.그는 왕궁이나 깨끗한 자연 혹은 알을 깨고 태어나지 않았다.그의 탄생은 다소 이례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하층 계급의 스토리이다.이것은 불교나 힌두교의 성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면모다.단순히 그의 출신성분을 떠나서 훨씬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이것은 아마 초기 기독교의 뿌리를 이루었던 하층계급 사람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다.

 

신의 아들이 그렇게 더럽고 누추한 장소에서 태어났다는 것.비록 별이나 동방박사 세사람을 동원한 윤색이 가미되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탄생 에피소드가 가지는 기본적 친밀함은 바로 그 가난함에 있다.즉 평범한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이다.이 얘기는 아마 기독교 초창기에 있어서 매우 큰 이점(advantage)으로 작용했을 것이다.목수라는 원래 직업,갈릴리라는 변방으로부터 등장한 아웃사이더스러움,그의 주요한 제자 그룹을 형성했던 그 지방의 어부들,그리고 가차없는 지배계층에 대한 공격은,어쩌면 당시의 사람들에게 광야를 가르는 시원한 일갈이자 '우리 대표자'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물론 이것 역시 그저 추측일 뿐이다)

 

특히 예수의 주요 제자들의 출신성분을 보고 있노라면,현대의 일부 기독교 성직자들이 떠올라서 가소로움을 감출 수 없다.권력과 돈과 부동산을 'stairway to heaven'으로 생각하는 그들이 예수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으니,예수의 고독은 이제 깊은 우울로 바뀌었을 것이다.

 

예수의 탄생 에피소드에서 또 하나 강조되고 있는 것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이다.물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동정녀 수태'를 믿지 않을 것이다.그들은 예수라는 종교적 영웅에게 신화적 아우라를 씌워주고 싶은 소망에서 나온 우연한 창작이라고만 이 사건을 생각할 것이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2천 년 전의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중얼거릴 것이다.이것은 그냥 이해해주자는 것이거나 완전한 무관심의 표현이다.그리고 그런 이해에는 어쩔 수 없는 경멸과 체념이 깔려 있다.

 

그러나 '동정녀 임신'은 예수만의 현상이 아니다.중근동의 많은 종교영웅들이 그렇게 태어났다.재미있는 것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던 구약의 예언서에도,또 초기 기독교의 훌륭한 디자이너였던 사도 바울도,'동정녀 마리아'를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동정녀가 강조되는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또 사도 바울에게 마리아는 그렇게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어쩌면 그는 그런 쪽의 가설을 들은 적도 없었거나,아니면 여성이란 젠더에 대한 그의 성향으로 볼 때 들었어도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혹시 동정녀 엄마에 대한 이런 언급은,다른 문화나 다른 종교 전설의 영향과 뒤이은 퓨전 때문에 도입된 것은 아닐까,아니면 예의 신화적 모습을 갖추기 위한 끼워팔기에 더 가까운 것일까.그것도 아님 혹 성부로 대변되는 신의 남성적 요소와 성령으로 상징되는 신의 여성적 요소가 온전하게 결합한 존재가 바로 예수였다는 ,후대의 성 역할에 대한 또다른 인식이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어진 것일까.

 

그러나 한편으로 예수 사후,시간이 지날수록 예수의 부계 혈통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다윗 왕을 거쳐 아브라함과 아담에까지 연결시키는-을 강조하는 풍토가 조성되면서,예수의 모계혈통을 (혹은 여성 쪽의 뿌리를) '동정녀 마리아'에 한정시키려는 의도가 숨쉬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이런 의도는 예수의 주요 제자이자 기독교 초창기의 막강한 증거자였던 막달라 마리아를 폄하하고 -어떤 성서는 그녀를 매춘부로까지 비하한다- 그 비중을 약화시키려는 기도와 그 맥이 닿는다.우리는 언젠가 기독교와 여성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천천히 살펴볼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자궁에서 태어났든,아니면 아주 일부의 주장처럼 로마 병사의 사생아이든,그 역시 그렇게 중요하지가 않다.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 되겠지만,그가 사생아라 하더라도 예수의 삶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차라리 동정녀 임신 운운하는 것은 현대 기독교의 장래를 생각하면 은근한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더 높다.이런 가설은 폐기되어도 큰 상관이 없다.이런 수태가 진실이라면,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를 상상할 사람들이 더 많이 태어나게 될 미래엔 예수 외계인설이 대세를 이루게 될 것이다.이질감만 증폭시키는 고대의 설화적 요소들을 굳이 우기고 고집하는 한,기독교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이 확실하다.물론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환상적 요소들이 숨쉬고 있는 생각의 숲이 더 매력적이다.무엇보다,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