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2천 년 동안의 고독 1.
작년 이맘때쯤 나는 2천 년 전의 유대 지방의 젊은 설교자이자 스스로도 예상이 불가능했을런지도 모를 거대한 종교적 운동의 창시자가 된 한 청년인 예수에 관한 글을 썼었다.예수의 생애를 그린 몇몇 영화와 연계해서 였다.첫번째 글은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마태복음>이 텍스트로 차용되었었는데,그 영화와 글에서의 예수는 철저한 신의 아들이자 거룩한 종교적 집합체였다.그러면서도 사회적 불의와 계급적 정의를 결코 잊지 않는 하층계급 반항자의 면모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두번째 글은 인간적 요소들-욕망과 갈등과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을 안고 있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마틴 스콜세지의 <예수 그리스도,최후의 유혹>이라는 영화가 기반이 되었었는데,아무리 스콜세지가 예수의 인간적 면모-특히 십자가 위에서의 결정적인 죽음을 망설이고 도망치는 모습-를 그렸다고 하더라도,그의 예수는 여전히 하늘의 신과 연결되어 있었고,적어도 신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이고 어찌 보면 너무나 인간적인 주장-이 '아들'이란 단어는 가끔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에서 그리 벗어나 있지 못해 있는 듯 보였다.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고,또 나는 그렇게 썼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1년이 흘렀다.나는 예수에 대해 글을 쓰기를 멈췄으나,눈으로 읽혀지고 귀에 들려오는 예수의 여러가지 모습은 여전히 존재했다.예수를 천상의 미약으로만 오인하고 허용량 이상을 잘못 복용한 중독자들로부터,예수를 십자가의 어두운 그늘에 강제로 밀어넣은 채 그의 어떤 이미지만을 차용하여 노골적으로 명백해보이는 비즈니스를 즐기는 사람들,그리고 2천 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권력자들과 가진 자들의 알리바이가 되어버린 -요즈음의 그는 어떤 모순된 법정에 잘못 호출되어 출석한 불운한 증인 같다- 예수의 모습까지,수많은 예수의 모습이 정말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래서 어떤 때 그는 세상의 하늘을 장식한 거대한 모자이크와도 같아서,사람들은 순간적 필요에 따라 그 모자이크의 한 조각을 마음대로 떼어내 쓰고는 쓰레기통에 갖다버리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따라서 우리는 예수를 쓰레기 하치장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실체는,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를 진짜 예수는,2천 년의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그는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고독 속에 유폐되어 있고,어쩌면 차가운 비웃음과 메마른 긴장감을 가지고 2천 년 후의 광란을 지켜보고 있을런지도 모른다.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 2천 년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그의 쓸쓸한 고독함을 인지하는 것과 2천 년이란 시간차는 또다른 개념인 것이다.또 그의 고독함에도 여러가지 레벨이 있다.종교적 열광과 죽음에의 경도라는 첫번째 근본적인 고독함에서부터,기독교가 시스템화한 종교로 발전되어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소외되어 갔던 예수의 모습까지,그의 고독은 인류의 일부 정신사를 관통한다.
2천 년이라는 시간 역시 근본적인 장애로 기능한다.또 어떤 기독교인에게 이 시간은 진실한 의미에서의 고민거리이다.예수는 분명히 그 시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그때의 언어와 그때의 사고방식으로 진술하고 행동했다.그가 살아있던 삼십 몇 년은 분명히 그 당시의 역사를 벗어나지 못한다.이것은 기본적 전제다.그러나 이런 전제를 인정했을 때,예수의 실체가 형편없이 쪼그라들고,심지어 신의 아들 -자꾸만 이 '아들'이라는 단어를 쓰면 웃음이 새어나온다- 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그들에게 예수는 2천 년의 세월과는 아무 상관없는 늙지 않는 사람이며,어디에나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다.그들은 그렇게 예수를 한정짓는다.거실의 진열장에 올려놓고 애지중지하기만 한다.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제쳐놓자.(굳이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내키지는 않는다.피곤하다)
또 예수의 의미를 그가 살고 죽었던 2천 년 전의 시공간에 완전히 고정시켜 버리는 일도 아주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그런 일은 광개토 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일이지,'하늘 위의 모자이크'처럼 채집되고 이용되는 예수 같은 인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이다.그것은 또한 예수의 의미가 자꾸만 여러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기 때문이고,그 해석의 틀에 따라 수많은 이미지와 ,또 운동의 에너지로 변용되기 때문이다.시간과 공간과 정치경제적 필요와,또 예수를 생각하는 개인들의 정신상태에 따라,예수는 언제든 변하고 뒤틀리고 짜여지고 노래된다.그는 따라서 록이며 블루스이며 재즈이다.그레고리안 성가이기도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철저한 왜색가요라는 의미에서의 트로트이다.
따라서 한 세대와 한 시대 내에서도 얼마든지 다른 예수들이 거의 우글거려가며 공존할 수 있다.가령 한기총의 목사들의 알리바이로 기능하는 예수와 소망교회의 장로들이 일주일에 한 시간 씩만 생각하는 예수,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하염없이 거리를 헤매는 가엾은 사람이 생각하는 예수가 모두 다 똑같을 수는 없다.
그 반대편의 예수들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는 결코 팔레스타인 출신의 설교자가 아니다.그들의 눈엔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휴전선을 가로지르던 문익환이 예수로 보인다.그런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강점인지도 모른다.그는 유연하고 마법사처럼 변신한다.중남미 붐 세대 작가들의 소설처럼 환상적이며,어떤 때는 DC코믹스의 슈퍼 히어로들처럼 몸에 착 달라붙는 쫄쫄이 바지를 입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떤 한 입장,다시 말해 어떤 한 예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물론 그 선택 역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개인의 내부에서 변하고 또 변할 수 있다.이런 과정이 철저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사실 그렇기도 하다.생각해봐야 할 사람,읽어야 할 사람은 예수 말고도 차고 넘친다.그러나 예수에 대한 태도 결정은,결정한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를 올곧이 드러낸다.그래서 예수는 일종의 표지자다.너무나 많은 해석들이,너무나 극렬하게 모순되는 생각들이 그를 둘러싸고 존재하기 때문에라도,예수는 하나의 선택을 강요한다.그래서 그는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며,또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고독 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다소 무망한 일이기도 하지만 예수와 관련된 몇몇 쟁점들을 정리하고서 그를 다룬 영화로 넘어가야 한다.사실 그에 대한 논쟁거리들은 무궁무진하게 많지만,몇 가지만 추려서 얘기하기로 하자.
1.예수는 실재했는가,그리고 그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들
예수는 정사 속에 뿌리 박힌 인물은 아니다.알렉산더 대왕처럼 세계를 정복하거나 한무제처럼 한 왕조를 개창한 사람은 아니다.그가 직접 쓴 책도 없으며,그에 관한 기록,그가 했다는 말들은 모조리 구전되어 내려온 것을 정리한 것이다.그의 제자들은 제각각 기억을 다투었고,인간의 기억이란 그리 신용할 만한 것이 못된다.머릿속의 기억이 글을 쓰는 손으로 옮겨지면 욕망이란 새로운 요소가 반드시 부가되니 말이다.따라서 이런 종류의 편찬 작업엔 이기적인 윤색과 고의적인 오류의 가능성이 엄존한다.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또는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첨삭되고 재단되었다.그런 요소들이 전혀 없는 완전무결한 경전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성경의 얘기들이 성령의 감화 아래 완벽한 진실로 쓰여졌다는 반론도 제기될 수 있겠으나,그런 얘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로 성경의 편찬 작업,다시 말해 정전화 작업을 주도한 사람들이고,이런 주장은 다시 말해 승자들의 기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실존 자체가 창작이었다고 보기는 좀 무리다.비록 역사서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지만,예수의 삶과 인생은 몇몇 책에 분명히 쓰여 있다.아마 예수는 실재했을 것이다.그런 것 조차 부인하기 시작하면 좀 허무해지기도 하는 것이다.차라리 그의 삶을 비현실의 영역으로 몰아갔던 것은 그의 탄생과 삶 자체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의 아우라와,그리고 조작의 혐의일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