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꼭 언급되어야 할 2010년의 영화들.1

폴사이먼 2010. 12. 31. 17:47

송년의 눈.

 

2010년이 간다.내리는 폭설들이 2010이라는 숫자를 아예 묻어버리려는 듯 쏟아붓고 시간은 또 그렇게 간다.

 

내겐 정말 정신없는 한해였다.갖가지 복잡한 일들이 내내 벌어져 여기저기 막으러 동분서주하느라 한 해를 다 보낸 느낌이 든다.왜 점점 내 시간이 없어져만 가는 건지,이젠 거의 의문을 넘어서 의혹의 심정까지 가지게 된다.삶이란 것이 처음부터 내게 그런 식으로 시간을 배열시켜 놓은 것인지,아니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2010년은 그 전 2년처럼 폭력과 거짓말과 퇴행의 한 해였다.죽음과 파괴를 향한 지향은 여전하고 그런 지향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의 대항 역시 여전하다.이런 대결은 중간중간 정리단계의 폭발을 거칠 것이다.그 폭발력 여하에 따라,사실 개인의 삶도 엄청나게 달라지는 것인데,정작 삶을 살아가는 개개인들은 그런 폭발적인 변화를 잘 느낄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그러나 최후의 폭발이라는 것도 있다.1987년에 그랬던 것처럼,1960년에 그랬던 것처럼 혼란을 수반하지 않는 변화라는 것은 거의 없다.폭발의 전조가 아직은 느껴지지 않으나,우리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치리더들에게 희망을 걸 필요는 없다.우리는 그들의 속셈과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속고 또 속는다.또 지금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잃는 순간 또 '터치'당하게 된다.그래서 이젠 작은 그룹의 작은 리더들이 훨씬 중요하다.조그만 세상들이 달라질 때,큰 세상은 태풍을 만난다.이것도 나비효과인 것일까?

 

2010년이 가고 있는 이 때,나는 여전히 2010년의 영화들을 쓰고 있다.아직도 써야 할 영화들이 밀렸고 또 밀렸다.그리고 시간은 없다.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달력이 맨 앞 숫자를 2011로 바꿨는데도,난 2010년에 보았던 영화들에 대해서 쓰게 될 것인가? 차라리 여기서 멈춰버리는 것이 나을 것인가?

 

그러나 시간이란 건 참으로 우스운 거다.2011년 1월 1일과 2010년 12월 31일 사이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변동만 있지,어떤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 아니다.그냥 우리 인간들이 편의적으로 기호와 의미를 부여한 것 뿐이다.흐르는 시간을 막을 방법이 없으면서도,여기에 자의적인 의미를 붙여서 분류하고 나누는 태도도 우습다.내 2011년은 1월 15일쯤 시작한다고 선언한다면 어떨까? 안되는 것일까?

 

그러나 선언 역시 자의적인 분류이다.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그래서 그냥 시간을 좀 더 들여 쓰면 될 것도 같다.내 2011년은 1월 중순에나 보게 될 아핏챠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엉클 분미>를 보는 순간  시작한다.그렇게 말하면 될 것 같다.(이토록이나 시간관념이란 것은 우스운 것이다.)

 

그래도 이 글을 읽고 있을 몇 분께 행복한 한 해를 빌어드리고 싶다.우리의 삶은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평화로울 권리가 있다.그 권리를 위해서 분투하자.그래서 최후의 행복감을 느끼자.

 

거장들의 서늘한 숨결 - <하얀리본>

 

영화의 세계에도 소위 '거장'들이란 게 있다.야구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관객과 평론가들에게 검증받아왔고,스스로가 문화의 아이콘이 되어있다.스포트라이트도 받는다.당연히 그들의 영화세상에서의 발언권은 강력하고,영화제작에 대한 진입장벽도 낮다.(예외는 물론 있다.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마이스터 임권택 감독이 최근 겪고 있는 영화제작의 어려움을 생각하면,우리 사회는 아주 젊거나 역동적이거나 매우 무례한 사회이다.)

 

그러나 마이스터들의 영화라고 해서 모두 다 성공작인 것만은 아니다.매년 어떤 거장들은 참담한 실패와 답답한 제자리걸음을 겪고 걷는다.가령 2010년의 올리버 스톤.그가 발표했던 1987년 그의 작품 <월 스트리트>의 후속작 <머니 네버 슬립스>가 바로 그런 경우다.한마디로 한심스런 시도였다.20여년 전의 재기는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그는 나름대로 자본주의의 변화를 따라가려고 애를 써보지만 ,예전의 날카로움은 없어져버렸다.무딘 창끝을 휘둘러대며 무릎 관절의 퇴행성 관절증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마이스터들은 언제나 마지막 한 방을 감추고 있다.올리버 스톤 역시 다른 작품으로 재기할 것이다.다만 그가,더 이상 현대미국의 자본주의를 다루지 않았음 할 뿐이다.

 

반면 서늘하고 차가운 시각으로 자신이 속한 세계를 응시하는 작가들도 있다.

 

 미카엘 하네케가 그 중 하나다.그는 자신이 여전히 녹슬지 않았음을 그의 2010년 영화 <하얀 리본>을 통해 증명해낸다.

 

 

<햐얀리본>은 그의 어떤 다른 영화들처럼 참으로 종말적이다.몇년전 부산영화제에서 보았던 <늑대의 시간>은,관객이 영화에 집중하든 말든,온통 검은 어두움이 드리운 암흑의 시간이었다.그렇다고 꼭 그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응시한다는 것은 아니다.다만 그의 위치와 태도가 날카로운 부검의사의 과학적인 정밀함을 닮아있을 뿐이다.그는 차갑고 서늘한 눈과 감각으로 그가 속한 세계에 냉정한 진단과 선고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2010년에 그가 돌아보았던 것은 그가 살았던 20세기다.20세기의 가장 중요한 특질이었던 파시즘에 관해,그것이 배태될 수 밖에 없었던 환경과 제도,그리고 그 안에서 폭력을 가하고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그는 유려하게 그려낸다.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초로 보이는데,그때는 아직 나치즘이 등장하지 전이지만,어찌 보면 아직은 정치적인 안정과 평화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지되었던 그 시기를,그는 사실은 그 평화 이면에 벌서 폭력의 맹아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인식을 가지고 묘사한다.

 

봉건영주처럼 한 지역의 경제권을 쥐고 있는 남작이 있고,그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목사가 있으며,체제의 부속처럼 작용하는 중간계급의 지식인이 있고,피지배자인 민중들이 있다.그리고 그 작고 큰 체제들은 서서히 흔들리고 뿌리부터 잠식당하기 시작한다.사건과 사건들이 연달아 나타나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제풀에 지치고 만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체제를 흔들고 파괴하는 사람은 -영화 속에서 분명한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의 소년소녀들이다.그들은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을 고의적으로 낙마시키고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을 장애인 소년의 눈알을 도려낸다.그들은 철저한 복종과 겸양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그들 내면에 흐르는 거의 무목적적인 폭력성은,체제를 완벽한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충격적이다.

 

하네케가 그들의 그런 측정불가능할 정도의 강대한 에너지를 대비시키는 것은 백색과 흑색의 순수이다.그의 영상은 거의 강렬할 정도로 관객의 눈을 찔러대는 흰 눈의 벌판과,조용한 어두움,그리고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순수함이 관객의 감각을 정화시키는 것은 아니다.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무언가 위험한 것들이 튕겨져나올 것만 같은 위기감이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옥죈다.특히 하얀 눈밭들,저런 곳에서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고 있다고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로,<하얀 리본>속의 자연은 무심하고 말이 없다.

 

물론 순수란 것 자체가 원래부터 그런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선이든 악이든,정의든 불의든,그 어떤 개념도 장악하지 못한 무색의 영역,그것을 순수라 총칭할 수도 있다.그러나 하네케는 바로 그런 순수함으로부터 폭력이 배태되었다고,언뜻 생각하면 거의 모순이라고까지 느껴질 수도 있을 발언을 시도하는 것이다.바로 아이들의 마음 말이다.

 

물론 힌트를 준다.실마리도 제공한다.영화 속 목사는 자기 아이들의 작은 일탈 마저 용납하지 않는다.그는 아이들의 팔에 하얀 리본을 묶어가며,기독교적인 복종과 규율과 영혼의 청결을 강조한다.

 

 

특히 큰 딸과 바로 손아래의 아들이 표적이 된다.거기에 두 아이들은 매우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다.누나는 아버지인 목사에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듯 하지만,이면에서는 연쇄적인 폭력을 계획하고 저질러서 저항하고 (그 아이의 저항은 자신의 세대를 대표하는 일종의 고백이다.세대간의 싸움에서 아랫세대가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 20세기의 특징이었다고 하네케는 얘기하고 있다),끝없는 위선을 가장한다.

 

반면 순수를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는 아들은 영혼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겪는다.아이는 끝없는 죽음에의 유혹에 시달리며 정신적인 불안을 겪는다.물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오해하고 병자로 치부해버린다.이런 근본적인 정신적 불안과 몰이해 역시 파시즘을 만들어낸 중요한 요소였다고 하네케는 결론 내리는 듯 하다.

 

 

 (아이는 이렇게 자신의 육체를 삶과 죽음 사이에 던져 넣는다.죽음에의 충동이 정치적인 힘을 가지게 될 때,파시즘이 또 하나의 날개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다)

 

거장답게,하네케는 한 시대의 초상에 대한 책임을 ,그 시절에 살았던 한 세대와 계급에게만 돌리는 것은 아니다.당시 중류 계급의 성적인 부패와 비겁,도덕적인 무관심에도 그는 메스를 들이대고 책임을 묻는다.예를 들어 그 작은 사회의 지식인이자 중간계급을 대표하는 의사는,동네의 산파와 지속적인 불륜관계에 놓여있고,심지어 자신이 딸에게마저 성적인 손길을 던진다.중간계급의 무능과 권태 그리고 부패 역시 파시즘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그는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폴커 쇨렌도르프가 영화화했던 귄터 그라스 원작의 <양철북>의 접근법과 유사하지만,<양철북>이 마술적 환상주의를 동원해서 서사의 풍성함을 이끌어낸 반면,하네케는 그 어느 곳 하나에도 중요한 방점을 찍지 않는다.그는 종말적 풍경과 파멸적 순수에 경도되어 있고,그 어떤 긍정적인 전망이나 위로도 내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미카엘 하네케의 이런 굳은 태도,경직된 묘사는 하네케의 그 근사하고 수려한 영상에도 불구하고,불가피하게 파시즘적인 일면을 가지고 있다.그의 시대가 바로  그러했을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그가 직접 지목했던 폭력과 광기의 주범들은 바로 아이들이다.물론 아이들에게서 본질적 폭력성을 발견했던 에술가들 역시 -특히 샘 페킨파가 포함되어야 한다- 한 둘이 아니지만,그 어떤 희망과 출구도 봉쇄해놓은 폐쇄공간의 연쇄적인 폭력주범으로서의 아이들을 지목하는 행위는,현상의 본질에서 경제적 계급과 잔혹한 권력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효과를 낳는다.아이들의 순수한 눈망울에서 우러나오는 파괴력은 그만큼 커다란 것이다.

 

물론 하네케 같은 거장이 그런 점을 간과했을 리는 없다.이 말은,실제로 그가 아랫세대 -물론 그 세대는 오히려 하네케와 더 가까운 세대이지만-의 자연스런 악마성을 20세기적 인간의 본질로 묘사했다는 뜻이 된다.즉 거장의 서늘한 눈길은 인간의 마성을 지나치게 근본적인 지점까지 파고 들어가는 통에,오히려 20세기의 실제 사건들을 우화의 수준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한다.유감이다.

 

거장의 또다른 숨결 -<유령작가>

 

또 한 사람의 거장인 로만 폴란스키의 눈길은,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정치권력지형을 겨눈다.그는 권력의 최상층부마저,미국의 군산복합체와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조종과 통제 하에 놓여있고,결코 그들의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정말 능수능란하게 보여준다.

 

 

 

체제의 근원적 비밀로 접근해가는 힘없는 지식인과,꼭두각시와 희생양으로 전락해가는 권력자라는 전통적인 구조를 차용한,그의 거의 일상적으로까지 보이는 영화적 능력은,예술 쟝르의 마이스터들이 매우 평범하게 작업해도 나오는 어떤 우수한 결과물을 상기시키면서,관객에게 찬탄과 경이의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어쩌면 평범하고 귀족적으로 잘생긴 배우이기만 하다고도 할 수 있을 피어스 브로스넌 조차 ,폴란스키의 지휘를 받게 되자 그의 영화 인생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뭐,이완 맥그리거는 워낙 잘하는 배우다)

 

미카엘 하네케가 하얀 눈밭의 극장적으로 순수한 명도를 통해 시대에 대한 극적인 서늘한 감각을 보여주었다면,로만 폴란스키가 차용한 배경은 거친 잿빛의 하늘과 구름과 바다이다.회색빛으로 일렁이며 숨가쁜 이빨을 보여주는 <유령작가>속 파도의 일렁임은,주인공인 작가의 황량하면서도 긴박한 내면과 등장인물들이 처한 숨가쁜 위기와,그리고 그 안에서도 피어오르는 날카로운 간계들을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마이스터들은 이렇게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환경-땅과 하늘과 바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살아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압박한다.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이름값일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폴란스키 역시,하네케처럼 희망적인 실마리를 제공하지 않는다.폴란스키의 주인공은 아예 죽는다.이완 맥그리거가 연기하는 유령작가가 거대한 음모의 공식을 발견하는 순간,폴란스키는 자신의 주인공을 거의 일상적으로 보이는 교통사고처럼 위장하여 죽여버린다.

 

그렇게 그는 그의 시대를 혐오하고 비관한다.그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옳은 태도이냐 하는 질문일랑 조금 뒷켠에 제쳐 놓자.차라리 우리가 던져야 마땅한 질문은,왜 20세기를 살아갔던 영화적 거장들이 이렇게 서늘한 비극적인 시선과 태도를 견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그런 반 푼 어치의 낙천성은 권력욕에만 취해 있는 2급 정치가들에게서나 나오지,거장 예술가들의 두뇌에서는 그 출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는 것 같다.왜 21세기는 이렇게 비관적으로 시작하는가,왜 그들은 지식인 계급 -<하얀리본>에서는 교사,<유령작가>에서는 작가-의 한계를 스스로 절감하며 보여주는 것인가.

 

그 어떤 희망적인 비젼도 제시하지 않는 21세기의 도입부.영화라는 쟝르의 극단적인 낙천성과 비관주의를 생각해보더라도,한 번 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바로,하네케나 폴란스키 같은 사람들이 저렇게 이완 맥그리거처럼 고민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영화; <셔터 아일랜드> <인셉션>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