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의 기록-부산에서의 가을 3
이제 가을은 완연히 지났다.춥고 싸늘하다.약간 늦잠을 잔 덕택에 여름 바지를 잘못 입고 출근한 나는 아침부터 떨고 있다.가을 여행의 마지막 글을 빨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추우니까 정신이 번쩍 나는 것이다)
8.휘파람을 불고 싶다 (If I want to whistle,I whistle)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루마니아 출신 신인 감독 플로린 세르반의 첫번째 영화다.보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물론 다르게 보이긴 하겠지만,이 영화는 내게 일종의 정치 풍자극으로 보였다.독재와 억압에서 갑자기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감옥을 무대로 하고 인질극과 형제간의 애정, 자유에 대한 감각, 교도소 안의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어떻게 보면 매우 흔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도 보였다.사실 이런 영화,너무 많으니까.
다만 이 영화 역시,'방법'이 달랐다.이 영화 역시 지난번에 얘기했던 마시모 코폴라의 <암흑의 공포>처럼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다.편집은 불균질했고 얘기들은 갑작스럽게 툭툭 끊어졌다.대부분의 영화에서 관객에게 안식처와 여유를 돌릴 시간을 만들어주는 영화음악은 아예 없고,교도소라고 제시된 공간 역시 전혀 교도소 답지 않았다.그냥 양아치들을 모아놓은 학교처럼 보이기만 한다.
다시 말해 이 영화 <휘파람을 불고 싶다>는 관객의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교도소의 담장 밖이자 스크린의 바깥에서 화면을 바라보는 관객이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는 - 영화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만을 들은 이후에- 자유에 대한 강한 갈망이나 동구권의 정치상황에 대한 통렬한 풍자나,심금을 울리는 가족간의 사랑이나 -주인공 소년은 오로지 오래 전 자신을 떠난 친모가 자신의 동생을 서구 나라로 데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출소 5일을 앞두고 인질극과 탈옥을 결행한 후 붙잡혀 결국 더 오래 교도소에 머물게 된다- 무기와 경찰이 동원된 인질극과 탈주극 따위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교도소 내부는 한없이 조용하고, 깨진 유리창이 동원된 담장 안의 인질극은 고작해야 학교 내부에서 학생들이 벌이는 싸움 정도의 폭력 레벨을 보여 준다.동생을 향한 애틋한 사랑이 관객으로 하여금 감동의 실마리를 만드는 듯도 하지만,결정적으로 탈주에 성공한 주인공이 인질 여학생과 하고 싶었던 건 고작해야 조용한 까페에서의 커피 한 잔 정도 밖에 없었다.(그나마 인질은 커피잔에 손도 대지 않는다)더 많은 감정의 흔들림을 기대했던 관객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인공 소년은 자신의 소망을 이루지만 -동생의 떠남을 막고 인질과 커피를 마시는 것- 바라보는 관객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좀 더 많은 임팩트를 원했던 관객의 입장에선 만족할 만한 마무리가 아니다.실제로 부산의 극장 안에서는 약간의 웅성거림과 헛웃음,심지어 잡담까지 들려왔었다.
그러나 플로린 세르반이 이런 류의 관객 반응을 예측하지 못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그가 이렇게 심심하게 영화를 만든 데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생각하는 탈주 이후의 자유라는 것이 고작 한 잔의 커피라는 것에도,그가 생각하는 나름의 루마니아의 자유에 대한 관념이 숨어 있는 거였다.즉 루마니아를 옥죄었던 과거의 억압 역시,안쪽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된 교도소 정도였고,거기서 탈주한 후 얻게 된 서구에서의 자유,유럽연합이 제시하는 자유 역시 고작해야 커피 한 잔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항변이 영화 전체의 질문이었던 것이다.즉 소련 붕괴 이후 동구권의 상황에 그렇게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서구인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드라마틱한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어머니와 동생이 서구로 가서 하층계급의 노동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만 발생한 것이고,루마니아의 사람들은 여전한 빈곤과 가난 아래 -마치 다시 수감된 주인공 소년처럼- 다시금 살아가게 된 것 뿐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서구영화계는 -뭐,정확히 말하면 베를린 영화제는-이런 종류의 역설적인 영화에게,더구나 신인 영화감독의 데뷔작에게 트로피를 안겼던 것이다.그것은 또 하나의 역설,서구 영화계의 막다른 골목을 증명한다.수혈이 필요한 상황인 그들의 빈혈 상태를 여지없이 증명하는 것이다.그러나 새로운 에너지를 찾으려는 그들의 노력 만큼은 인정해주어 마땅할 것이다.
9.사람들2
다음 영화인 이스라엘 영화는 사실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종말적 풍경이 현대 거대도시를 배경으로 심상하게 펼쳐진다는 영화제 측의 설명은 매우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그러나 세 명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 영화를 방해했다.그들은 내게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영화를 포기하고 자신들과 점심식사하기를 권유했고 내겐 거부권이 없었다.(물론 이런 상황에서, 휴가를 내고 자기 직장에 조차 안 나가는 오세훈 정도의 똥배짱은 내게없었다)
그들을 온라인 상에서 만난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다.나는 이 사람들을 참 사랑하고 어느 면에서는 존경하기까지 하는데,그것은 글과 평소의 언행 ,즉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드문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그들은 좀처럼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않았다.그들은 언제나 솔직했고 자신의 고통과 고민을 부드럽게 드러냈다.다른 쪽으로 말하면 그것은 매우 젊은 영혼의 소유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또다른 쪽으로 말한다면 위선이나 거짓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들이란 얘기다.
이런 종류의 정신적 체질들은 대개 타고 난다.청아한 감성이 반짝이는 지성과 결합해서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간에 활기와 생명력을 배양시킬 수 있는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닌 것이다.현실생활에서야 조용조용히 걸어가며 주변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도시의 요정 같은 존재이거나,또 그 요정의 소울 시스터라고 자신을 일컫는 또 한 사람처럼 강인함과 예민함이 혼재하며 거침없음과 상처받기 쉬운 연약함,그리고 과감한 항의로 요동치는 삶을 살고 있거나,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난 반팔차림의 아가씨처럼 젊음 특유의 낙천성과 명랑함으로 무장했지만 상대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를 아끼지 않는 존재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그런 사람들은 짧은 점심식사이긴 하지만,만나서 얘기하고 다시 롯데 백화점의 옥상에 올라가서 부산항을 함께 바라보기에 최적의 사람들인 것이다.비록 보고 싶었던 영화 하나를 날렸지만 말이다.
또한 공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서 만나기가 어렵다.우리의 주위란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고,그 삶의 연결고리들을 통해서 관계맺는 사람들과는 좀처럼 일상과는 다른 종류의 정신적인 세계로 짓쳐나가기 어려운 것이다.그러나 어떤 사람들과의 이런 우연적이고 짧은 만남이 반복되게 되면,그런 종류의 여행이 매우 쉬워진다.심지어 함께 동화를 쓰거나 환상소설을 만들어내는 일 마저 가능해지는 것이고 이런 것이 바로 인터넷 번개의 진정한 의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그들의 편에 선다.(물론 대부분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가급적이면 그들의 현재 삶에 축복을 보내고 그들의 앞으로의 삶에도 아름다운 나날들이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그리고 이런 나의 바램이 글자 그대로의 진실이 되면 내가 그들에게 하는 말 역시 진실과 진심에 접근하게 된다.그래서 결국사람들의 진심이 서로 만나게 되면 그것은 마치 축복의 예언처럼 각자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일도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나는 예수가 살아있을 때 했던 기적의 예언들도 다 그와 같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일년에 한 번 씩,그들의 얘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그들의 드라마를 보고 그들의 우울과 명랑함이 교차하는 일 년의 얘기를 듣게 될 것이다.그리고 언제나 그 사람들의 편에 서서 내 진정한 말로써 그들을 축복할 것이다.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그냥 행복이기 때문이다.물론 오해받을 수 있는 행복감이다.그런 오해,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10.꿀벌.안티 블록버스터적인 대안
내 마지막 영화는 역시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탄 터키의 세미 카플라노글루 감독의 <벌꿀>이었다.이 영화 역시 <휘파람을 불고 싶다>처럼 음악이 없었다.정확하게 연결된 내러티브도 없었고,이야기는 하나의 큰 줄기 를 두고 강물처럼 이리저리 흘러간다.공간은 대부분 숲속이며 숲 자체의 풍경과 배우들이 간간이 던지는 대사들이 어쩌면 영화의 전부이다.
꿀벌을 치는 아빠와 그의 아들,갑자기 실종된 아빠,기다리는 가족들,아빠를 찾아나서는 어두운 숲속의 아이,그리고 일상들..주로 이런 이야기다.놀랄 만큼 조용한 영화였기 때문에 관객들이 곳곳에서 잠들고 있었다.아마 나도 영화 보기 전 마신 박카스 두 병이 아니었다면 눈꺼풀의 긴장도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화면을 바라보고 있으면 거의 정적 속에 묻힌 아침의 찬란한 숲속과 아이의 순진한 눈망울이 아무 말 없이 얘기를 시작하고,간간이 끼어드는 일상들이 속삭이듯 관객을 깨우려 한다.그것은 매우 지루하고 느린 시간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데,그러다가,어느 순간 ,이 영화는 기묘한 종류의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시작한다.영화의 내러티브가 미묘하게 갈라지는 느낌,영화 속에서 나타나는 갖가지 이미지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전달해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예를 들어 계속 강조되는 벌꿀의 이야기에서,관객은 벌꿀이 상징하는 이슬람적인 축복의 가능성,거기서 좀 나아가면 죽은 아빠가 도달한 곳,내세,또 죽음 이후,그럼에도 남겨진 아들과 엄마가 보여주는 심상함,또 나타나는 고통스러움,결국은 죽음과 삶의 이슬람적 이미지를 읽게 된다.그리고 그 벌꿀의 이야기는 어떤 독립적인 내러티브를 가지고 흘러가는 것 같다.(어쩌면 착각일런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바라본 관객의 두뇌 속에서는 또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갈 것이다)
또 숲,내게 영화사상 최고의 숲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정글과는 또 다른 종류의 숲,정지된 시간감각과 흐르는 시간감각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이상한 숲,아이에겐 아빠를 찾아헤매는,그래서 이세상과 저세상 사이의 결정적인 징검다리처럼 기능하지만,아빠에겐 일상적인 노동의 숲인 그 숲.그리고 그 숲의 이상하지만 정갈한 공기들.
또 그럼에도 벌어지는 축제들,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일상들,사람들의 생활.
이 영화는 묘하게도 어떤 끈으로부터 시작하여도 영화가 진행된다는 정말 대단한 특성을 갖는다.문제는 관객이 영화의 조용하고도 끈질긴 지루함 속에서 영화의 이런 끈 하나를 잡아내야 한다는 것이다.감각은 영화 자체로부터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관객 자신이 영화의 내부,영화의 숲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이런 끈을 잡게 되면 관객은 새로운 모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그가, 숲을 잡게 되든 벌꿀을 잡게 되든 아이의 천진한 눈동자를 잡게 되든,그때부터 관객은 새로운 영화보기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그것은 마음의 모험이며 세상 사람 모두에게 가능한 맑은 여정들이다.개개의 관객 모두에게 서로 다른 형태로 파악되는 영화,스스로의 감각이 각성되어 진행되는 영화,이 영화 <벌꿀>은 그런 영화다.
그리고 나는 이런 영화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안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나아가서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영화예술의 또 하나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하고,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이 가야 할 길이라고도 생각한다.관객은 언제나 영화가 자신의 감각을 일깨워주기만 기다린다.강한 정서적 반응 -그것이 어떤 희로애락이 되었든-을 기다린다.영화가 그런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안되는 것처럼 여긴다.심지어 강한 자극이 영화의 미덕이라고까지 생각한다.그 결과 영화는 점점 더 강해진다.강하게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지 못하면 탈락하고 도태된다.그리고 당연히 거기에 자본이 끼어든다.자본은 영화의 감각적 강도를 더 강하게 만든다.관객은 거기에 적응하고 영화와 관객은 끝이 보이지 않는 레이스를 시작한다.그러나 끝이 과연 없겠는가..
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를 지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그 어떤 작품도 일방적인 소통 만으로는 산업적 기능 밖에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깝고도 먼 미래에 영화의 앞날은 칼날 같은 기로에 서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나는 이 쟝르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관객의 감성을 유도하는 영화가,그래서 결국 관객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
10.사람들3
난 마지막으로 두 명의 남자들을 만났다.매년 부산영화제의 일요일 저녁을 함께 보내는 분들이다.자갈치 시장에서 소주와 회를 마시고 또 마시며 얘기하는 일종의 정례행사다.우리는 그 날 글을 쓰는 것 자체의 문제,진보세력의 미래..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그 얘기를 다 할 수는 없다.오늘 눈이 왔고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핑게가 약간 보잘 것 없다)
그러나 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고립된 삶들에게 희망을 주는 대단히 중요한 행사라고 생각한다.또 느슨한 연대를 유지하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외로운 인간들의 환기구라고 생각한다.난 이들을 내년에도 만나고 내후년에도 만나도 언젠가 은별이와 함께 갈 부산에서 또 만날 것이다.(그런데 은별이가 싫어하면 어쩌지?)
이렇게 삶을 또 버텨가고 또 버티어가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