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정치인의 초상들PART3.통합의 헤게모니.<인빅터스> 그리고 <밀크>

폴사이먼 2010. 4. 8. 15:12

언제 어느 때 무슨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도 항상 평균 이상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 영화 <인빅터스>는 6월이면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1995년을 무대로 한다.남아공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연상되는 넬슨 만델라가 주인공이며,오랜 영어 생활 이후 대통령이 된 그가 여전히 그 사회의 가장 치열한 문제인 흑백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백인들의 스포츠인 럭비를 이용한다는 실제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브랜드의 영화이다.자신과 가장 호흡이 잘 맞는 스탭들과, 또 좋은 연기력을 소유한 배우들인 모건 프리먼이나 맷 데이먼을 기용해서 관객들의 감성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그의 방식들은 여전히 유효하다.적당한 순간에 끼어드는 감동적인 음악들과 보는 사람들의 감정 정도를 적절한 수준에서 요리해내는 이스트우드만의 노하우는 여전히 빛이 난다.아주 자극적이거나 혁명적인 언설이나 장면들을 동원하지 않으면서도,좋은 우파로서의 할 말을 다 하고 마는 이 할아버지 감독의 방식은 그 자체로도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여기까지 써 놓고 이 영화 <인빅터스>의 리뷰를 곧장 끝낸다 해도 사실은 아무 문제도 없이 무방하다.그러나 또다시 수다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이스트우드가 20세기 인권탄압의 아이콘인 만델라를 동원하여,하필이면 '통합'이란 대주제를 운위하기 때문이다.그리고 또한 그 '통합'의 문제야말로 21세기 지구사회가 맞닥뜨린 가장 해결불가능한 문제 중 하나이기 때문이고 말이다.

 

 

 

 

백인들의 스포츠인 럭비연습이 진행되는 깔끔한 학교운동장과 흑인들이 주로 즐기는 운동인 축구연습을 즐기는 흑인 꼬마들의 모습이 보이는 황무지 같은 공터가 제대로 대비되는 첫 장면을 지나면,만델라의 기록 필름들이  뒤를 잇는다.그다음 나타나는 사람들은 만델라의 경호원들인데,그들은 여전히 상존하는 만델라에 대한 백인들의 거부정서와 테러나 암살의 위협을 두려워하듯 뻣뻣하게 긴장한 채 만델라를 경호한다.

 

이어,질주하는 차량의 모습이 나타나서 만델라와 그의 경호원들과 교차편집되는데,이 차량은 마치 만델라의 목숨을 노리는 듯,숨가쁘고 치명적인 궤적을 그리면서 관객들의 마음까지 콩닥콩닥하게 만든다.(물론 이것은 이스트우드옹의 장난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델라는 기존의 질서를 완전히 전복시키지 않겠다는 듯,백인 각료들을 유임시키고 경호팀의 절반을 백인들로 채운다.'용서는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는 도사 같은 말을 남기며 오히려 동요하는 그의 지지자들을 설득한다.만델라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통합의 메커니즘을 밀어붙이며,흑과백 양 계층의 눈에 서린 의혹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프로그램들을 진행시켜나간다.

 

그는 그 프로그램의 결정적인 계기로서 남아공이 개최하는 럭비 월드컵을 설정한다.그는 흑인들이 사갈시하는 백인들의 럭비 대표팀인 스프링복스 팀(각국의 국가대표 럭비팀엔 그들만의 고유한 이름이 있다)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이슈화함으로써,흑백간의 화합이라는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달성하려 한다.강함과 부드러움,그리고 카리스마와 정치적인 도덕성을 동시에 소유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만델라의 이런 의도는,주변의 반대와 백인들의 냉소에 부딪치면서도 꾸준하고 끈질기게 현실화되어진다.

 

이후 영화는  공식대로 달려간다.영화가 시작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만델라로 나오는 모건 프리먼이 국가대표 럭비팀의 주장인 맷 데이먼과 회합을 갖고,그와 통합의 리더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그는 encourage나 inspiration같은 단어들을 사용하면서 부드럽게 데이먼을 설득하는데,그 설득은 사실 맷 데이먼 보다는 관객들을 향해 던져지는 화두들이다.

 

그 변환점이 되는 변화 이후,갖가지 과정들- 럭비 팀 내부에서 벌어지는 만델라 정권에 대한 반감,맷 데이먼 가족으로 상징되는 백인 계층의 질시와 의심어린 시선,흑인 경호팀장이 표현하는 흑백간의 긴장,그리고 이어지는 화합의 단계들-을 거쳐,결국 남아공 럭비 팀은 당시 최강팀인 뉴질랜드를 연장전 끝에 꺾고 우승한다.결승전에서는 당연히 흑인과 백인들이 힘을 합쳐 그들 모두의 국가대표팀을 응원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여 남아공의 국가를 부른다.과거에는 오히려 백인들의 럭비팀의 패배를 원했던 흑인들이 스프링복스를 응원할 때,마치 남아공의 해묵은 인종간의 갈등은 잠깐이나마 그 첨예한 칼날들을 스스로 접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관객들 역시 월드컵에서 우승한 남아공 럭비팀의 주장인 맷 데이먼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때,심정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함과 아울러,그들의 화합을 믿게 되고, 잠깐이나마 우리나라 역시 하나로 뭉치게 했던 2002년한일월드컵의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노련한 이스트우드는 기둥 줄거리 곳곳에 작은 얘기들을 심어놓는데,가령 인종간 화합을 주창하는 만델라 자신이 딸과의 불화 때문에 고초를 겪고 있달지,경호 팀 내부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달지 하면서 영화 내부에 조용하고 작은 흐름들이 따로 운영되고 있다.

 

결국 남아공화국은 1995년 럭비 월드컵 결승전에서 승리해 우승한다.상대는 하필 뉴질랜드인데,그 나라 역시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영국으로부터의 식민 경험과 원주민인 마오리족을 가혹하게 탄압했던 전력을 가지고 있으며,뉴질랜드 대표팀의 주력선수인 당대 최고의 선수 조나 로무는 바로 남태평양 섬나라 통가 출신으로서,그는 백인들과 마오리족 선수들이 혼합된 올블랙스 팀(뉴질랜드 국가대표팀의 애칭이다.나는 로무의 팬인데,질주하는 그의 모습은 마오리 전사의 현대적 양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의 최강 에이스로서,그로 대표되는 올블랙스는 어쩌면 남아공 팀 보다 먼저 인종간의 혼합을 이끌어낸 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로무의 저 무서운 돌진을 보라)

 

이렇게 이럭저럭 영화는 끝난다.이스트우드 영화 특유의 잔잔한 엔딩 음악과 아프리카 토속 음악이 깔리며 영화는 감성적으로 마무리된다.그러나 개운치 않은 뒷맛 역시 함께 남는다.

 

그들은 정말 인종간 화합에 성공했을까? 이 시합 이후로 흑인과 백인 양자는 진정한 통합에의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을까? 나아가서 스포츠 시합 같은 이벤트성 상황이 현실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까? 혹시 이것이야말로 넬슨 만델라 본인이 지닌 근원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물론 남아공의 현재는 1995년의 그 밤과는 확연히 다르다.백인들이 장악한 경제권력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빈부의 격차 역시 극심하다.흑백간의 갈등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고 범죄와 무질서 역시 상존한다.영화 <디스트릭트 9>이 보여주었던 우화적인 요하네스버그의 모습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따라서 <인빅터스>가 얘기하는 '통합'은 오히려 현실호도에 지나지 않으며,그들의 갈등은 이런 일순간의 스포츠 이벤트로 해소되기 어렵다는 반론이 터져나오기 꼭 알맞은 상황이다.

 

그러나,만델라가,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런 반론의 가능성,그런 반대의 목소리조차 예상 못할 정도의 사람들은 아니다.만델라 역시,럭비 시합 정도로 뿌리깊은 남아공의 인종간 갈등이 치유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만델라는 스프링복스 팀에 대한 자신의 계획을 끝까지 밀어붙였고 ,이스트우드는 이 사건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냈다.도대체 왜 그랬을까?

 

여러가지 가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어쨌든 통합을 향한 첫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이 존재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이런 첫 발걸음을 위해 어찌 보면 이벤트에 불과한 정치적 퍼포먼스를 만델라가 단행했다는 논리도 가능할 것이며,또한 이스트우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정치적인 얘기가 아니라 만델라의 영혼 그 자체,영화에도 등장하는 싯구 인빅터스 ,바로 정복되지 않는 영혼에 관한 이야기였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이 영화는 전적인 혹은 정치적인 '통합'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고 말이다.<인빅터스>는 '통합'이 아니라 '통합의 헤게모니'에 관한 영화이다.다시 말해 이 영화는,복잡하고 첨예한 갈등 상황 속에서 과연 누가,어떤 세력이 통합의 헤게모니를 가지고 통합을 추진해야 하는가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다.바로 '정복되지 않는 영혼',그 숱한 고난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우위와 꿋꿋한 추진력을 가진 주체,넬슨 만델라와 같은 사람이 통합의 손길을 건네기 시작할 때,바로 통합에의 첫걸음이 가능해진다는 얘기를 이스트우드 영감님은 하고 싶었던 것이다.전형적인 좋은 우파의 언설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지배세력들이나 권력들이 말하는 '국민통합'은 언제나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기획되어 왔다.그들이 말하는 통합은 항상,피지배세력의 강제적인 침묵과 굴종을 의미한다.그들은 항의하는 세력 모두에게 사탕과 채찍을 동시에 건네고,달콤한 유혹과 가혹한 협박을 일삼는다.그런 상황에서도 정복되지 않는 자들,그런 사람들이 통합의 헤게모니를 쥐어야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완전한 통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원칙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어떠한 통합의 장에서도 통합의 제 세력들은 서로의 소유물들을 양보함으로써만이 테이블 위에서 진행되는 협약서 위에 도장을 찍을 수 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정당한  세력 조차도 일단 기득권을 확보하게 되면 자신의 권리들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이런 예들은 너무나 많아서 거의 열거하기도 어렵다) 화합의 과정들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는 말이다.

 

또한 소위 '정복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개념범위에 대한 고민과 아울러,그들이 힘을 소유했을 때에야 통합에 관한 시도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 역시 가능하다.가령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면 럭비 월드컵을 이용한 정치적 퍼포먼스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27년간의 로벤섬 투옥생활 중 그가 아무리 통합을 부르짖었어도 백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도대체 없는 사람들,박해받는 사람들,차별받는 사람들,사회적 소수자들은 어떻게 통합의 발걸음에 참여할 수 있을까? 만델라 같은 명망가의 권력을 경유해서? 아니면 모든 권력자들을 다 타도한 연후에?

 

그런 질문에 관한 조용한 해답을 제시하는 영화가 하나 있다.2008년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만들고 당대의 명배우로 발돋움해 나가는 숀 펜이 나오는 영화 <밀크>가 그것이다.

 

숀 펜은 197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 게이 액티비스트로 활동하던 정치가 하비 밀크를 연기한다.자신의 암살을 미리 예견한 밀크가 어느 밤 녹음기에  마지막 말들을 녹음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사회적 소수계층이 나가야 할 어쩔 수 없는 길들에 대해 넌지시 얘기한다.

 

40세가 될 때까지 월 스트리트의 증권맨이었던 밀크는 40세가 되던 해 커밍아웃한다.샌프란시스코로 거처를 옮긴 그는 그곳에서 학대받고 폭행당하는 동성애자들의 상황을 목도하고는 운동가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연속된 낙선에도 좌절하지 않고 시 행정관에 도전하던 그는 결국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도정치권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그러나 결국 가족주의와 보수 기독교,그리고 경찰 권력을 등에 업은 동료 행정관 화이트의 총탄에 의해,자신을 지원하던 샌프란시스코 시장과 함께 암살되고 만다.

 

이 짧고도 굵은 생애를 구스 반 산트는 특유의 시간 뒤섞기와 몽환과 절제,그리고 맑음과 어두움을 교차시키는 질감으로 표현한다.물론 이 영화가 구스 반 산트 최고의 걸작은 아니지만,그는 영화 곳곳에 특유의 인장을 남기며 한 사람의 인생을 인상적으로 표현해낸다.그런데 구스 반 산트가 하비 밀크를 무슨 이상형의 정치인,이상적인 혁명가로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밀크는 어쩌면 철저하게 현실적이었다.세 번의 낙선은 오히려 그에게 적절한 선거전략을 꾸미게 만들었으며,자신의 외양을 좀 더 시민들의 거부감을 사지 않는 쪽으로 변화시키게 만들었다.현실정치인으로서의 그는 이상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다른 세력과의 타협과 토론을 아끼지 않았다.보수적 언론마저도 적절히 이용했으며 선동가와 싸움꾼적 기질과 토론가적 기질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그러나 그의 이런 정치적 행동방식은 자신이 대변하는 그룹의 권익을 위해 철저하게 봉사하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때로는 과감하게 또 때로는 노련하게 상황을 돌파해나갔다.그러면서도 결코 원칙에서 물러서는 타협만은 하지 않았다.하비 밀크 역시 넬슨 만델라처럼 '정복되지 않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만델라처럼 대통령의 지위에 올랐던 사람이 아니다.그는 자신이 속한 그룹을 위해 상대방과 타협을 벌이고 일전을 불사하지만,그들과의 통합을 위한 헤게모니를 쥘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그런데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소수는 결코 다수에게 진지전을 감행할 수 없는 법인 것이다.그래서 밀크는 거의 올라운드 플레이어처럼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다.그는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병행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반대자를 무시해버리지도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소수는 결코 통합협상의 테이블 위에 나설 수 없다.(반한나라 대통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먼저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그래야 통합의 헤게모니 싸움에 낄 수 있다는 것,밀크는 그 점을 철저히 알고 있었다.꿈 속을 헤매는 이상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밀크가 살해당했을 때,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것은 그의 그런 면모가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선거 시즌이 다가오자 갖가지 추잡한 코미디들이 줄을 잇는다.내가 사는 동네의 한나라당인 민주당은 시장경선의 부작용으로 검찰에 수사까지 의뢰했다.(얘기를 들어보니 부정선거의 개연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구에 태어났으면 당연히 한나라당 의원이었을 사람들의 소동극을 바라보며,숀펜이 연기하는 하비 밀크가 생각났다.그 어떤 선거를 맞닥뜨린다 해도,결국 유권자는 자신의 후보에게 투표해야만 한다.게이는 게이 후보자에게,노동자는 노동자를 대변하는 후보에게,즉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에게 투표해야만,사회라는 거대통합틀에서 통합의 헤게모니 싸움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하비 밀크의 삶이 바로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