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FILM FLOATING

정치인의 초상들 PART1 <일 디보>

폴사이먼 2010. 3. 31. 10:11

1.정치인들의 초상

 

21세기의 정치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이미지만을 생산한다.다양한 컨텐츠를 가진 이들 조차도,화사하거나 박력있거나 지성적인 이미지를 구비하지 못하면 (한마디로 대중의 입맛에 부응하지 못하면) 대부분 좌초하고 만다.단 한 번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구축되어도 실패할 가능성이 너무나 높아졌으며,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악마와의 거래도 서슴지 않는다.(가령 현재 벌어지는 검찰의 한명숙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헛스윙은 사실 그 허구성을 미리부터 짐작하고 벌이는 일이 아닐까? 이미지 훼손에만 그 목표를 두고서.)

 

이런 시대에 오히려 유리한 정치인들,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미달된 함량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미지만을 주구장창 긁어모으며 질긴 생명을 유지해야 할 정치인도 있을 것이다.'꼭 완전히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차기 대통령에 가장 근접해있는 박근혜 의원 같은 사람은,그저 옛시대의 정치인들처럼 화두 하나만을 던지고선 침묵해버린다.그는 최근 문제가 된 세종시 수정 문제에 있어서도 그저 '약속'이라는,과거로부터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건전한 단어 하나만을 발음하고는,나머지는 주위의 수다쟁이들이나 서포터들에게 맡겨버린다.나는 그녀가 지금까지 구체적인 근거와 논리로써 토론을 이끌어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그녀는 힘과 힘 사이의 균형이나 권력의 이동점에 대해 본능적인 인식이나 지향점을 가지고 있지만,자신의 내면을 '이성'으로써 통해 놓은 적은 거의 없다.아마 그녀의 출신 배경이나 살아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그런 일은 아예 불가능하거나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일런지도 모른다.중세시대나 절대왕조시대에나 어울리는 행동패턴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그것이 그녀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러나 이성의 시대는 마지막 인사도 없이 지평선을 향해 떠나고 있는 중이다.논리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도덕과 용기로써 세상을 리드하고 가감을 분명히 따지면서도 긍정적인 타협을 이끌어가던 다분히 계몽적인 이성의 시대는 이제 종막을 고하고 있다.오히려 말초적인 감각에 호소하고 단발성 액션이나 이벤트를 통해 사람들의 오감에 대화를 신청하는 쪽이 대세다.인터넷의 글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라.어떤 종류의 글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휘어잡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더구나 정치인의 경우,권력이나 이상의 성취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더더욱 이러한 변화에 민감하다.그들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변해가는 세태에 반응해야 하는데,더더구나 21세기에는 시간이 더욱 없어졌다.그들이 가진 기회의 시간에는 확실한 한계가 있고 작은 실수 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들은 최후의 카드를 사용할 기회를 노리고 있어야 한다.(최근 들어 정치경력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사람들이 대통령직에 오르고 있는 이유는,부정적인 비난을 살 만한 일들을 할 시간과 대중이나 매스컴에 노출된 시간이 상대적으로 짧았기 때문일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역시 우리의 가카는 진정으로 출중한 인물이다.그 짧은 시간 안에 그리도 많은 일을 저지르고도 테이프를 끊었으니 말이다)

 

정치인들의 이미지를 검증할 메커니즘 역시 감성에 호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그 방법 또한 감성의 저항과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지며,따라서 권력을 쥔 세력의 공격에 더욱 취약해진다.권력은 자신의 눈엣가시들을 양비론의 함정에 몰아넣고 시간을 벌어서 그들을 고사시킨다.그리고 그런 작업 역시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면서 이루어진다.그러다보니 흔히 '언론'이라 부를 수 있는 검증 메커니즘은 자연스럽게 그 힘이 약해지거나 지나치게 강해지고,거기서 얻어지는 달콤함을 자본과 권력은 철저하게 공유해서 나누어 가진다.어떤 의미에서 21세기 언론은 정치인 자체의 내면을 분석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도구의 위치로 떨어져가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정치인을 다루는 픽션이나 넌픽션 영화는 상당히 많다.만드는 사람들의 포지션에 따라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 있는 정치영화는 ,우리나라에 많지 않아서 그렇지,실제로는 아주 많이 만들어진다.

영화 역시 기본적으로는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매체이다.그러나 한 가지,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관객은 적어도 60분에서 120분에 이르는 시간 동안.꼼짝없이 객석에 앉은 채 감금되어 스크린을 노려보고 있어야 한다.집중이 가능하다는 말이다.찰나 같은 감성이 지배하는 이런 시대에 영화 같은 매체는 어쩌면 일종의 축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단 잘 만든 영화에 한해서 말이다.

 

2.일 디보,그리고 줄리오 안드레오티

 

 

파올로 소렌티노라는 이탈리아의 젊은 영화감독이 있다.2008년 그가 만든 영화 <일 디보>는 깐느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데 (내 기억력에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영화를 만들어낼 정도라면,거의 거장의 맹아를 가졌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감독이다.

 

전후 이탈리아 기민당의 지배적인 정치가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인생을 거의 몇 일 안에 뭉뚱그리면서도 그의 전생애를 한꺼번에 포괄하고 있는 이 영화는 거의 걸작의 반열에 올려도 될 정도의 컨텐츠를 가지고 있다.정치적 공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안드레오티 내면의 격정과 구조를 동시에 묘사할 줄 알고,영화를 일관하는 어두운 톤의 색깔 배치는 영화가 유지하는 암살과 테러와 부정행위들을 암시하는 데에 충분하다.카메라는 넘치는 재기와 클래시컬한 정공법 사이를 효과적으로 왕복하고 영화음악은 클래식에서부터 록음악까지를 다 아우르는데 영화의 진행에 적절히 스며들어 관객을 위로할 줄 안다.비발디의 플루트 협주곡에서 가브리엘 포레의 파반느,생상의 죽음의 무도와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영화의 상황과 조화를 이루어 영화의 진행에 윤활제가 되어 준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절묘하게 균형이 잡혀 있다.마피아와 결탁해서 살인을 저지르고 정적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일단의 부패한 정치집단의 리더이며 자신의 비밀을 폭로하려는 동료 정치가 알도 모르가 붉은여단에게 납치당해 결국 살해당하는 것을 방관하는 안드레오티의 어두운 이면에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면서도,그의 인간적인 면들 - 아내에 대한 사랑과 지역구민들과의 교류(물론 여기에도 금전이 관계되어 있다),그리고 촌놈 컴플렉스에 이르기까지-과 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에도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소렌티노의 페르소나 토니 세르빌로가 연기하는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가끔은 폭풍 같은 독백을 통해 또 어떤 때는 허를 찌르는 비아냥이나 여우처럼 노련한 거짓말과 상황 넘기기를 통해 전후 보수 정치가의 어떤 치명적인 초상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그는 자신이 저지르는 모든 악행을 '선을 위한 악행'이라고 치부한다.자신의 철저한 위법행위 조차도 ,그는 결과적인 선함과 신의 왕국을 위해서 저지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강변하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이탈리아 공화국의 정상적인 작동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는다.

 

 

 

토니 세르빌로는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육체와 영혼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스크린 위로 부활시킨다.그의 연기는 너무도 즉물적이어서 관객은 징그러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노회함과 의외의 순수함,비열함과 엉뚱한 몽롱함이 수시로 교차하는 그의 안드레오티 연기는,토니 세르빌로 자신의 육체를 특수하게 변경시키면서 시작된다.

 

 

 

(밑의 사진은 실제의 안드레오티의 모습이다)

 

목을 잔뜩 웅크리고 소심한 듯 큰 눈알을 돌려대다가도,청문회나 검찰에 불려나가서는 당당하게 말대꾸한다.자신의 입장을 변호할 때는 그야말로 확신에 찬 러시를 감행하다가도,끝끝내 양심의 가책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살해된 알도 모로가 환각을 통해 나타날 때는 억눌린 듯한 공포와 불안에 쩐 모습으로 변신한다.

 

 

그렇게,파올로 소렌티노와 토니 세르빌로는 줄리오 안드레오티를 이탈리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전형으로 제시한다.그러나 그들은 안드레오티를 단순한 이미지나 감성으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그들은 영화의 수많은 디테일들을 통해서 그의 실체와 이탈리아 사회 전체를 논리적으로 조명하려 한다.그래서 그들은 영화 속 이탈리아를 시스티나 성당의 거대한 벽화처럼 조직하고 그것을 일별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살아왔던 세월을 판단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이미지와 감성은 이렇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3.우리 정치인들이 다뤄지는 법

 

우리나라의 영화와 드라마들에 나오는 정치인들의 초상은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희화화되어있다.어던 의미에는 진지하지도 않다.균형감각을 이유로 정치적으로 공정한 편에 서려고 하지도 않는다.그들은 자신들이 묘사하는 정치인들에게 오직 한 가지만의 색채를 입히려고만 한다.그렇게 해서,한 인물의 인생과 그들이 살아왔던 사회 전체를 조각하는 대신 ,하나의 임팩트로만 그 인물을 기능하게 한다.

 

몇년전 문화방송이 그려냈던 <제5공화국>에 나온 전두환이,의외의 찬양을 받았던 것과 심지어 추종자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던 것은,그 드라마의 제작진이 쿠데타 주역으로서의 마초성만을 그에게 부여했기 때문이다.반면 <일 디보>는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생애를 그리면서 그가 끼쳤던 부정적인 영향들을 결코 잊지 않았다.빠른 편집을 통해 수많은 사건들을 스크린 위로 올려보냈고 안드레오티의 비열한 내면을 그대로 공개했다.

 

이탈리아의 정치판을 뒤흔들었던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추진하던 이탈리아의 검사들의 활약상을 도외시하지도 않았으며,공정함에 대한 희망을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이 영화를 만든 시절은,유죄판결을 받아 후퇴했던 안드레오티가 다시 재기해 상원에서 활약한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현재의 권력자를 겨냥해 그들은 이런 영화를 만들었던 것이다.이미 죽어버린 시체에 칼질을 했던 것이 아니라 여전히 힘을 가진 사람에게 총구를 겨눴던 것이다.정권을 잡고 있는 사람은 안드레오티의 후예 베를루스코니였고 말이다.

 

이렇게 진실을 총체적으로 접근하려는 시각들이 온존하고 있으면 이미지와 감성 만으로 접근하려는 정치인들의 초상들은 그 효과들을 잃게 될 것이다.심지어 진부하다는 인상 마저 주게 될 것이다.우리 가카가 헬기를 타고 백령도로 접근하는 이미지들에서 사람들은 이미 낯익은 한심함을 느끼고 만다.(물론 그가 진심으로 그랬을 가능성도 있긴 있을 것이다) 오히려 북한의 공격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반응을 낳을 가능성이 많다.(북한의 공격 가능성이 있었다면 가카는 결코 헬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이미지들로만 파편화된 초상화들은 여전히 대세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도 가능하다.시대의 대세는 여전히 감성이기 때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