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화에 관한 편지-상실에 대하여 아내에게.
아내에게.
여보 안녕?
올 한 해 우리 둘 다 너무 바빴다.올해가 시작되던 첫날부터 우리가 가졌던 예감-올해는 우리에게 뭔가 전기가 되거나 역전이 되거나-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들어맞는 통에,올 한 해 우린 둘 다 각자의 일에 치이고 허덕였어.너무나 바쁜 일상에 시달리는 통에,난 당신에게 꽃 한 송이 변변하게 선물해주지 못했던 것 같아.당신이 이 편지를 볼 수는 없겠지만,이 자리를 빌어 사과해.(당신이 보지 못했다고 내가 사과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당신과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서 극장에 함께 가기 조차 힘들었던 올 한 해에 나는 거의 나 혼자서만 영화를 보러 다녔지.그건 당신과 만나기 전부터 그래왔던 것이긴 했지만,그래도 당신 없이 다닌다는 것이 약간 허전하기도 했어.사람은 이렇게 또 변해가는 것 같아.음..나도 이젠 확실한 중산층 아저씨다..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2009년에 내가 보았던 영화에 관한 편지야.이미 여러 사람들에게 편지를 부쳤는데,오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는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극단적인 '상실'이 주제나 소재가 되었던 영화들에 대한 편지야.상실.잃어버림.실종..좀 무서운 테마 아니겠어? 금방까지 바로 옆에 있던 어떤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는 것,가장 사랑했던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더 이상 눈 앞에서 볼 수 없어져버리게 된다는 것.정말 공포스러운 일 아니야?
사람들이-특히 나이가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가장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받는 때는 자신의 배우자가 사망했을 때라고 해.재산을 잃었을 때보다, 자식을 잃었을 때 보다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야.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아내나 남편이란,그들과 보냈던 자기 자신의 삶 그 기나긴 시간들을 상징하는 거니까,그래서 배우자의 죽음이란 자기 자신의 죽음과 거의 동일시되는 일이 되는 걸 거야.
나도 가끔 당신을 바라보면서 그래.아,저 여자가 없어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서리를 치지.언젠가 그 비슷한 의문을 내가 입 밖에 내었을 때 당신이 그랬지? 그때야말로 내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때가 될 거라고.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라고.물론 그 대답이 100% 그른 대답은 아닐 거야.아마 당신과 함께가 아니라 혼자였다면 정말로 난 자유시간을 맘껏 즐겼겠지.아마 지금처럼 쉬지 않고 일하지도 않을 거야.현실에 신경쓰거나 앞날을 걱정하지도 않았겠지.그냥 살았을 거야.그렇게 10년 전 처럼.
그러나 자유시간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또 책임져야 할 일들이 더 늘어났다고 해서 ,당신과의 삶을 불행으로 여기지는 않아.사실 그런 불만을 가진다는 것은 좀 찌질한 일이고 자신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거든.자존심이 있지,어떻게 그런 얘기를 늘어놓고 다닐 수 있겠나?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내겐 여전히 중요한 가치야.(어디 가서 그런 얘기 하고 돌아다니지 말라고 경고하는 당신의 눈빛이 눈에 보인다, 보여.) 게다가 적응력 하나는 또 내가 짱이쟎아.
그래도 우리에게 서로의 상실은 심대한 타격이 될 거야.마음은 황폐해지고 두뇌 안은 공허해지겠지.그런 종류의 재난들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도무지 눈을 뜰 수 없게 만드는 거니까.올 해,2009년에 내가 보았던 몇몇 영화들도 바로 그런 종류의 상실,아내를 잃은 남편과 엄마를 잃은 아이들,자식을 잃은 부모를 다루고 있었어.
제노바.
영국의 마이클 원터바텀 감독의 <제노바>는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딸들과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시카고의 대학교수인 아빠 콜린 퍼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이탈리아 제노바로 가족들을 데리고 떠나.착한 친구인 캐서린 키너-당신 이 여배우 알지? <카포티>에 나왔던.- 가 그들의 제노바 정착을 돕고.
이 가족은 어찌 보면 새로 이사간 그곳에서 평이한 삶을 사는 듯도 해.가끔 자다가 소리를 지르는 작은 딸- 이 아이의 장난이 엄마의 죽음을 유발한 교통사고를 야기했어-을 빼놓고는 그런대로 잘 흘러가는 듯도 해.아빠는 여전히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러다가 학생 하나와 핑크빛 무드로 발전하기도 하고,원래부터 약간은 반항적이었을 큰 딸 역시 이탈리아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하고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녀.영화는 이렇게 감정적인 눈물이나 슬픔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
그러나 그러면서도 예민한 불안감 같은 것이 영화의 모서리를 내내 감돌고 있어.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선율들이 지속적인 불안함으로 스크린을 점령하기 시작하고 윈터바텀의 카메라는 제노바의 광장이나 바닷가가 아닌 후미진 골목길들에 집중하게 돼.그 어둡고 훵한 골목길엔 차가운 눈동자의 타인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고,낯설고 쇠락한 그 길들은 두런거리는 낮은 목소리들과 무언가가 깨지고 떨어지는 소음들 ,그리고 보통의 밝은 세계와는 무언가 다른 기묘한 색깔들이 좌우하는 세상이야.
어두움과 밝음,빛과 그림자의 세계의 경계와도 같은 제노바의 오래된 골목길에서,그래도 나이가 좀 든 편인 큰딸과 아빠는 그래도 평상심을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어린 둘째딸은 명백한 혼돈에 시달리게 돼.딸의 눈에 죽은 엄마의 모습이 보이게 되는 거지.아이는 엄마와 지속적으로 대화하고 엄마가 이끄는 대로 도시의 골목길을 홀린 듯 돌아다녀.그래서 갑자기 관객들은 무슨 유령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돼.
아이의 눈에 보이는 이 엄마의 모습은 물론 아이가 가지는 죄의식과 그리움이 복합되어 나타나는 환각이겠지.그러나 아이가 엄마의 유령과 함께 제노바의 어두운 골목길을 누빌 때,그 불안함의 강도가 전면적인 폭발점에 다다를 때,우리는 이 상황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상실한 사람들의 상실감.그것은 길을 잃고 헤매는 거야.넓은 대로가 아닌 오래된 골목길들을.
결국 딸은 실종 직전에 아빠와 언니의 품에 안기게 돼.천만다행한 결말이지.그렇다고 이 가족의 상실감이 해결국면에 도달했다는 건 아냐.영화는 그렇게 끝나 버려.사실 그런 상실감에 무슨 해결점이 있겠어? 시간이,망각이 해결해주는 거지.감독의 명성에는 훨씬 못 미치는 범작에 가까운 작품이지만,상실한 사람들이 닥치는 상실감을 불안한 음악과 영상,그리고 어두운 골목길에서의 헤맴으로 표현한 윈터보텀의 솜씨엔 공감하지 않을 수 없지.
조용한 혼돈
이탈리아의 좌파 - 이 용여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겠지?-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가 출연하길래,그가 이 영화의 감독인 줄 알았는데,그는 그냥 배우였고 감독은 다른 사람인 영화 <조용한 혼돈>역시 아내와 엄마를 잃은 아빠와 딸에 관한 이야기야.
이 영화 역시 통곡과 눈물,그리고 슬픈 정조의 음악 따위는 사용하지 않아.엄마와 아내는 갑작스럽게 사망했지만,아빠와 아이의 감정적인 무드가 쉽게 흔들리지는 않아.일상은 조용하게 흘러가고 있어.그러나 그 일상의 밑바닥에서 아빠의 생활이 예외적인 방향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거야.
저 포스터 좀 봐.아빠가 벤치에 앉아 있지? 저 아빠는 아내가 죽은 다음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아이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 앞 벤치에서 무작정 기다리지.어쩐지 파울로 코엘류 삘이 좀 나는 것도 같고 좀 그래.재밌는 것은 저 아빠가 저렇게 파행적인 행동을 거듭하는 데도,세상이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는 거지.회사의 중역이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여전히 아빠는 저 상태에서 휴대폰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회사의 동료들은 그의 조언을 듣기 위해 벤치로 찾아 와.오히려 아빠는 무슨 벤치의 성자처럼 유명해지까지 하지.사람들은 그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그는 그들을 따뜻하게 감싸줘.
과거에 헐리웃에 진출했던 이탈리아의 여배우 발레리아 골리노는 처제로 등장하는데,그녀의 히스테리컬한 폭발을 난니 모레티는 어쨌든 해결하고 포용해.이상한 얘기지.정작 본인은 어떻게 본인의 상실감을 해결하는 것일까? 그는 거의 일상에 가까운 조용한 생활을 지속시켜 나가거든.학부모회의 엄마들과 수다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내를 잃은 충격과는 거의 무관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하거든.
그런 그가 유일하게 눈물을 보인 경우는,어느 날 죽음에 관한 세미나에 갔다가 감정의 컨트롤에 대한 강연을 들은 후야.강사는 이렇게 말해.부모가 너무나 지나치게 감정적 충격에 대해 초연해 있으면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무관심하고 초연해져 버린다고.난니 모레티는 이 말을 듣고 강연장에서 기절해.그리고 차를 타고 오다가 울음을 터뜨리지.그런데 그의 눈물은 꼭 슬픔이나 충격 때문만은 아니야.강연장의 강사와 청중들의 속물성에 대한 혐오감,그런 곳에서 기절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좌절감 같은 감정들이 같이 깔려 있어.말하자면 그는 이미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 있는 느낌을 주고 있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그는 절실하게 아내를 보고 싶어 하고 마리화나를 통해서라도 자기 감정을 폭발시키려고 해.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자기자신을 컨트롤하는 중산층 지식인 남성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지.대단한 자제력이라고 감탄 겸 비난에 가까운 심정을 가지게 될 정도야.그런 그가 진정으로 자신의 그런 '조용한 혼돈'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몇 가지 통과의례가 필요해.
그는 딸과 함께 아내가 죽은 해변의 별장을 찾아가.그의 아내는 영화 초입에,그가 해변에 휩쓸린 어떤 여자를 구원하는 바로 그 시간에 죽었거든.그 해변의 별장에서도,딸은 여전히 잘 버텨.오히려 아빠가 문제지.아빠는 아내가 죽던 날 구조했던 여자- 하필 그 여자는 난니 모레티 회사와 매우 관계가 있는 재벌이지-와 거친 섹스를 나누는 거야.이해가 돼? 아내가 죽은 그 집에서 딸이 옆 방에 자고 있는데,아내의 죽음과 약간이나마 관련이 있는 여자와의 섹스라니.
영화는 이 상황을 남자의 '여전한 혼돈'으로 그리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히려 섹스의 대상이 된 그 재벌녀에 대한 구원으로 읽으려 하는 것일까? 어찌 됐든 이 과정은 영화적으로 그 지식인 중년남성의 통과의례 같은 거야.그의 지속되어지는 파행-벤치의 성자로부터 시작한-의 끝처럼 그려지는 거지.혼돈에서의 탈출이 그 정도의 행사들로 가능하다면,인생은 좀 쉬운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는데 어쨌든 영화는 그렇게 진행돼.다만 한 가지의 가능성,사람들과의 교류를 전면에 떠올리는 방법을 취함으로써 영화를 평탄하게 마무리 지으려 해.
그는 학교 앞 벤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그는 그들과 지속적으로 얘기를 주고 받고 서로의 감정을 토로하는데,그것은 아내가 죽기 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들이지.저 위에 무슨 모델처럼 보이는 여자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저 큰 개만을 끌고서 벤치 주위를 산책하던 여자지.난니 모레티와는 가까워질 듯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가까워지지 않는 여자야.영화는 저 여자와 아빠를 인사시키면서 끝을 맺어.사람들하고의 소통,교류,.이것이 상실로 인한 상처를 이기는 방법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아.그리고 그것이 중산층 남자의 상실로 인한 일탈적 행동들을 상쇄시키는 한 가지의 방법으로 작용하는 거야.
맞는 말이긴 해.상처는 서로 힘과 마음을 모아서 이겨낼 수 밖에 없는 것이긴 해.그것이 참된 방법일 수도 있어.하지만 인생엔 위험한 변수들이 여러 개 도사리고 있기도 해.나쁘고 악한 사람들을 만나면 또 어떡하겠니? 내가 너무 비관적인 것일까?
엘라의 계곡
상실을 다룬 영화들은 앞의 두 영화 말고도 여러 개 있었지.가령 폴 해기스가 감독한- <크래쉬>를 만든 그를 나는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헐리웃 감독 중 하나라고 생각해- <엘라의 계곡>이 있어.
이 영화는 상실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우선적으로는 반전 영화야.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다루고 있거든.나는 이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군대에 보낼 아들이 없는 우리 둘의 상황이 어쩐지 다행스럽게까지 느껴진다니까.
저 노련한 배우 토미 리 존스의 아들이 실종됐어.아들은 이라크에 파병되었다가 기지로 귀환한 지 얼마 안된 병사지.저 아버지의 또다른 아들은 미국의 또다른 전쟁에서 나갔다가 전사했어.엄마인 수잔 새런든은 아들 둘을 모두 미국 군대에서 잃은 거야.아버지는 아들의 실종을 이해할 수 없어.더구나 그는 타고난 애국자이자 보수적인 군 출신의 노인이야.(이 역할을 이렇게 잘 해낼 수 있는 배우는 토미 리 존스 밖에 없을 거야.이스트우드는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 그의 조국에 대한 감정은 아주 강고하고 순결해.그는 자신이 속한 나라의 시스템을 전적으로 신뢰하지.그러나 그의 신념엔 점점 균열이 나기 시작해.아들의 행적은 솔직히 의심스러워.아버지가 믿어왔던 전우애라는 것도 미더운 구석이 없어.게다가 군 당국이나 경찰이 열심히 수사하는 것 같지도 않아.해병대의 수사관 출신인 아버지는 그래서 이 사건들을 스스로 조사해 나가지.
진실을 파면 팔수록,전쟁에 대한 추악한 진상이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 그렇게 계속 드러나.파견된 병사들이 겪었던 정신적인 상처들과 이라크 인민들에 대한 가혹행위 그리고 병사들의 서로에 대한 잔학상들을 영화는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순서로 배치시켜 놓았어.배우들의 계산된 연기들은 폴 해기스가 쳐 놓은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그 안에서 빛을 발해.더구나 이 영화의 각본은 스릴러 영화로서도 잘 짜인 각본이야.
그리고 그 스릴러는 결국 끝을 향해 달려가지.사건의 진상은 밝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결 이후의 해방감 따위는 없어.범인이 밝혀졌다고 아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니까.훈장이 수여되었다고 해서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상실감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니까.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미국 남부의 황량한 대지를 배경으로 해서 스크린을 메워.그 공허에서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왔던 미국이라는 나라,그 나라가 수행하는 전쟁의 와중에서 스러져가는 젊은 영혼들을 보게 되는 거야.영화는 계속 이라크 참전 병사들의 영혼 잃은 눈동자들과 그들의 빗나간 행동들을 다루고 있거든.
이렇게 이 영화 <엘라의 계곡>은 상실의 이유들을 은유하고 있어.직접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미국이 벌인 이라크 참전이 가져다주는 내상들을 다루고 있어.이라크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말이야.<제노바>가 오래된 제노바의 건물과 골목길들을 통해 사람들의 슬픈 상실감을 다루었고,<조용한 혼돈>이 중산층 남자의 상실 이후의 세계를 묘사해서 상실의 개인적인 측면들을 조명했다면,<엘라의 계곡>은 상실감을 넘어 그 배경이 되는 이유에 대해 초점을 맞추지.직격탄을 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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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내가 보았던 2009년의 '상실'들은 여러가지 모습들을 가지고 있었어.상실이란 참 여러 측면에서 또 여러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었어.사실 이런 '잃어버림'에 대한 스케치들을 우리는 또다른 여러 영화들에서,어쩌면 대부분의 영화들에서 찾을 수 있어.허진호의 가벼워진 로맨스 영화 <호우시절>엔 고원원이라는 아름다운 여배우가 등장해.
이 여배우가 연기하는 메이라는 중국 여인은 사천성 대지진으로 남편을 잃었어.그리고 그 상실감 때문에 예전의 클래스메이트 정우성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아.그러나 두보의 시가,두보가 묘사한 좋은 빗줄기들이,그리고 젊고 깨끗한 순정이,그리고 과거의 순수한 기억들이 그녀에게 약간의 해방 가능성을 제시해.난 이 영화를 즐겁게 보았어.당신이 이런 종류의 스토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혼자 보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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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엔 영화 많이 같이 보자.그리고 영화 얘길 많이 하자구.그런 종류의 대화들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의 중압감과 고통을 이겨내게 해 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마 난 당신보다 더 일찍 죽을 거야.우리가 자연사한다고 가정해 볼 때,당신 보다 4년 늙은 나는 - 우리나라 남녀의 평균수명까지 계산한다면- 당신 보다 적어도 10년은 더 일찍 죽을 거야.내가 죽은 이후 당신이 어떤 상실감에 시달리게 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같이 보냈던 기억들이 그 상실감을 메워줄거야.그래야 저 고원원처럼 상처에 괴로워하지 않을 거고.
자,그러면 이제 이 긴 편지 마쳐야겠다.행복하게,그리고 건강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