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화에 관한 편지-종말과 재난에 관해 병구에게 쓰는 두번째 편지.
좀 바빠서 어제 편지 못 썼다.이해해라.너야 지하에 잠들어 있는 시간이 워낙 많을 테니 내 편지를 줄기차게 기다렸겠지만,나야 지상에서 허덕이는 시간이 줄창 넘쳐나니 약속시간을 지켜내기라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겠니? 언제나 그 놈의 여유라는 것이 내 것이 될 지, 거의 눈치 챌 수 조차 없는 일이겠지만,언젠가 세상은 시간이란 행복을 내게 허락하겠지.그때까진 또 이렇게 가는 거다..
오늘 얘기할 영화는 저 포스터에 보이는 <해운대>야.너한테도 낯익은 배우들의 얼굴이 쫘악 보이지? 우리나라 최초의 재난 블록버스터라고 뻑적지근하게 광고도 해댔고 돈도 좀 번 영화라고 해.영화 보러 갔더니 사람이 많긴 많더라.(니네 영화하고 비교해보면 오히려 슬프기까지 했어.왠만한 스크린은 다 점령하고 있었거든) 그리고 뭐 재밌기도 했어.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재난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이 영화의 '재난'은 전체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돼.나머지 3분의 2는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야.코믹하고 슬프고 뭐 그런 거.알고 있지?
<2012>에도 제시되던 재난 비쥬얼 이전에 등장하는 익숙한 요소들 역시 그 3분의 2속에 다 나와.재난을 막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과학자,그를 믿지 않는 관료,별거하는 부부,그들의 사랑스러운 딸,양념 같은 조연들..이런 사람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대로 등장해.그들이 펼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몇 개를 모아서 시리즈로 보여주고 있는데 뭐,그냥 재미있어.관객들? 웃고 즐겨야지,다른 거 뭐 할 게 있겠니? 사람들이 언제나 좋아하는 로맨스 역시 여러 층으로 분포시켜 놓아서 그들이 완전히 지루해지기 전에 화면들을 적절히 이동시켜 놓아.그러다가도 관객들이 이 영화의 주된 적인 '쓰나미'를 잊을 정도가 되면,다시 쓰나미의 위험을 등장시키면서 우리가 곧 보게 될 재난을 상기시켜.영리하지만 어디서 본 것 같은 선택들이지.하지만 그렇다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어.그런 이의를 제기하기엔 난 좀 늙었거든.
결국 태풍과 해일이 닥쳐 오고 건물들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우왕좌왕 도망 다녀.애절한 죽음이 있고 감연한 희생이 있고 안타까운 최후도 있어.루틴한 공식대로 가는 거지.
물론 이 영화는 지구의 멸망을 다루지는 않아.그래서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 너의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크게 보이지가 않겠지.하지만 그거 역시 일종의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아직 우리나라의 영화 만드는 테크닉으로 지구를 다 무너뜨리기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이 영리한 제작진이 알아챘을 수도 있고,<디 워>나 이런 영화들이 감당해야 했던 비웃음섞인 냉소들을 현명하게 피해 가야 한다는 전제를 두고 영화를 만들었을 수도 있어.선택은 참으로 비즈니스적이었고,그런 선택을 적당하게 적중시켜 나간다는 것도 일종의 재능이자 미덕이지.
그리고 이 영화 <해운대>는 매우 로컬한 재난영화야.오히려 영화 소재의 로컬리티를 마구 증대시키지.최근 몇 년 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화적인 도시로 떠오른 부산을 무대로 부산의 익숙한 장소들을 관광가이드 하듯 훑어 다녀.올해와 작년에 부산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와 야구장 그리고 야구선수 이대호를 등장시킬 정도이니,또다시 말하게 되지만 이 영화 만든 애들은 참 영리해.그리고 귀여워.
배우들도 적절하지.설경구의 오버스러운 연기(여기서 말하는 오버란 그를 비난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냐.설경구의 평소 영화작업태도를 가리키는 거야.그의 연기엔 평상심이라는 게 없어.언제나 평균 이상으로 점프하거나 저 멀리 지하로 가라앉지.그런 태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고,그런 식으로 나가다 보면 자기 역할의 한계가 보인다는 걸 지적하고 싶어.예를 들어 송강호가 연기했던 <박쥐>의 신부를 설경구가 했다고 생각해 봐라.쟤 왜 저렇게 방방 뜨고만 있는 걸까,뭐 이런 생각 들지 않았겠니?) 가 이 영화에 적절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
다른 배우들 역시 대부분 자기 몫을 다 해.그들이 평소에 유지하던 영화적 이미지들에 자신이 현재 출연하고 있는 영화를 적당히 매치시켜 놓아.박중훈 만이 좀 문제가 되는 건데,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희한하게 생각했던 건,닥쳐 올 재난에 반항하고 저항하고 그걸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똥줄 빠지게 뛰어다니는 사람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였어.그냥 쓰나미 오기 전까지는 영화가 아니라 시트콤이야.웃기고 슬프고 자빠지고 가슴 설레는 연애만 하고 뭐 그래.쓰나미의 내습을 알아차린 사람은 주류에서 밀려난 과학자 박중훈 뿐이야.그런데 박중훈은 너무 무시당해.그리고 박중훈은 그 무시를 효과적으로 뚫고 나갈 추진력도 계획도 없어.그냥 신경질적으로 소리만 지르고 있을 뿐야.특히나 박중훈의 겉도는 캐릭터 연결능력이 극대화된 채로 영화 속에 여과없이 보여지고 있어서,원망스러운 심정- 어쩌면 그 타이밍의 부산시에는 제대로 머리 돌리는 인간 하나 없냐- 이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고 말아.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렇게 줄창 도망치고 물에 빠지고 허우적대고만 있어.물론 당연하지.쓰나미가 덮쳤는데,대책은 무슨 대책이야.그냥 도망치는 게 상책이지.하지만 말야.난 바로 이 부분에서 병구 니가 생각 났어.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적을 만나서도,아무도 너의 편이 아닌 상황에서도,누구나 미친 넘이라고 백안시하는 상황에서도,너는 지구를 지키는 미션을 위해 너의 없는 머리 있는 머리를 다 짜냈거든.
그런데 거기에 비해,<해운대>의 주인공들은 그게 아니지.그냥 무작정 도망친다.몇몇 희생자들이 있지만,그 희생자 역할들은 영화의 또다른 요소인 '눈물'을 위해서 존재해.가끔 영화에 필요한 장엄한 희생과 감동의 쓰나미를 위해서 존재해.
물론 쓰나미는 강적이야.그러나 이렇게까지 허둥대며 무너지는 쪽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건 너무 하지 않나? 박중훈은 거의 가엾어질 정도로 불안하고 무능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말아.
(결국 최후의 저항자라고나 해야 할 박중훈의 마지막 모습은 저렇게 끝나고 말아)
왜 저렇게 되야만 하는 걸까? 도저히 물리치지 어려운 재난을 맞이해서도 감연하게 저항하는 인물들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말야.가령 미사일에 몸을 실어 지구를 향해서 다가오는 거대한 운석에 몸을 던지는 <아마겟돈>속의 브루스 윌리스나 사람들을 위해서 최후의 에너지를 다해 싸우며 죽어가는 <포세이돈 어드벤쳐>속의 진 핵크만 신부를 우리 영화 속에서 바라는 건 좀 무리라는 걸까?
<해운대>는 접어두고 나서라도 ,그래도 최강의 기술과 공격력을 갖춘 헐리웃의 롤랜드 에머리히를 좀 봐봐.<2012>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은 결국 가진 자들을 위한 '노아의 방주'에 불과하고 말았쟎아.<2012>속의 인물들 역시 반항은 커녕 피해다니기만 바빠.도망가는 거엔 거의 우사인 볼트 수준이지.과학자라고 하나 있는데,그 친구 역시 실제로는 거의 하는 게 없어.왜 다들 이렇게 무력하게 물러나고 마는 걸까? 무엇이 어떻게 변해버린 걸까? 이젠 영화속에서 조차 영웅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일까?
해운대를 덮친 저 거대한 쓰나미를 다른 무언가에 대입해 보자.예를 들어 지구상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거대한 재난적 동물인 신자유주의나 두뇌는 시대를 역행하지만 통치기술 만큼은 기술적으로 발전한 MB정부에 비유해 보자구.거기에 우선적으로 저항해야 할,박중훈이 상징하는 주류와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지식인은 저렇게 신경질적이고 단발적인 비명만 지르다가 끝이 나.과거엔 역동적으로 적들에 대항했던 시민들은 구심력과 에너지를 잃고 저 심각한 물폭탄에 일부는 익사하고 일부는 살아남아,이제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무로서 뼈대만 남은 해운대의 건물들을 복구하는 운명에 처해지고만 말아.그리고 영화는 그런 상황들을 말없이 추인해.
그래도 여전히 권력을 가진 자들은 <2012>의 그것처럼 하필 중국(!)에서 만든 노아의 방주에 몸을 의탁한 채 살아남게 되는 거고 말이야.과거 병구 네가 저항했던 외계인을 상징하는 지배계급- 네가 외계인으로 지목했던 백윤식은 자본가이자 경찰청장의 사위로 설정되었었지-들은 모두 다 안전하게 살아난다는 말이야.돈과 기술을 이용해서 말이야.그러나 <해운대>와 <2012>에서 너 같은 태도를 읽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워.그리고 이 영화들이 영화계의 주류야.혹시 <해운대>와 <2012>가 가지는 재난과 종말에 대한 영화적 태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관류하는 무기력과 패배감을 읽어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이 두 개의 종말과 재난을 바라보며 내가 느끼고 만 씁쓸함이자 뒷맛일 거야.어서 빨리 다른 영화들이 등장해서 또다른 전환점을 마련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겠니?
병구야.결국 너 같은 또라이가 필요한 거 아닌지 모르겠다.그 모든 영역에서,특히 문화의 영역에서 맨 주먹만 가지고도 외계의 음모에 대응할 수많은 또라이 전사들이 필요한 상황일런지도 모르겠다고.
우린 말야.밀려오는 쓰나미에도 겁먹지 않고 씩씩거리며 돌진하는 그런 사람들이 필요해.지금은 숨을 죽이고 있을 지 몰라도 언젠가는 짓쳐 일어날 그런 너 같은 인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