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영화에 관한 편지.- 종말과 재난에 대하여 병구에게 1.
병구야.
이렇게 불러 보니 좀 묘하다.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막 이름 불러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하지만 지구상의 모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그 수다한 불멸의 캐릭터들은 언제나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는 거 아니겠니? 초면에 말 놓고 그래도 네가 좀 이해해라.
난 오늘부터 2009년에 내가 보았던 몇몇 영화에 대한 글을 편지 형태로 쓰기로 했어.뭐,사실 올 한 해 너무 게을렀던 탓에,또 너무 바빴던 탓에 못 본 척 눈 감고 넘어가 버린 영화도 많고,영화 보고 리뷰 쓰기로 작정해 놓고서도 그냥 지나쳐버린 영화들도 많아.하지만 여기에 내가 쓰는 글들은 다 내 개인적인 글들이고,내가 글을 안 쓴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거나 <2012>에 나오는 인공적 쓰나미가 온 지구를 덮쳐버리지는 않겠지.하지만 또 서운함이 남아.이제 내가 한 줄의 글로라도 요약해놓지 않으면,내가 보았던 올해의 그 영화들이 영원한 망각 속으로 떨어져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언제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거든.시간은 영원하고 인간의 기억은 한계가 있는 데다가,우린 모두 죽음을 향해 뛰어가는 거 아니겠니? (이미 죽어버린 너한테 이런 얘기하는 건 아무래도 좀 실례긴 하다.)
그런 아쉬움,그런 심정이 이 편지를 너한테 쓰게 한다.음,서론이 길었다.첨부터 다시 시작하자.
병구 잘 있었냐.안녕하긴 한 거냐.
2003년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지구를 향한 외계인들의 거대하고도 치명적인 음모를,지구상 그 누구도 모르는 그 엄청난 계략을,홀로 알아채고서 홀로 싸워나가는 21세기 최고의 히어로.그러나 결국 그 외계인 세력에게 목숨을 잃게 되는 비극의 사나이 병구.네가 지금 안녕하다면 좀 이상한 일이긴 할 거다.더구나 네가 나왔던 그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지구는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으므로 이런 의례적인 인사는 좀 우습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마,넌 내가 왜 하필 너를 2009년 영화를 다루는 이 글들의 최초 수신자로 지목했는지를 잘 알고 있을 것 같다.올 해 내가 보았던 몇몇 영화들이,네가 지키려고 싸웠던 바로 지구의 종말을,그 비극적인 운명들을 묘사했기 때문이거든.그래서 나는 종말에 관한 한 뭘 좀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너를 내 편지를 받는 사람으로 선택했다.젠장,그런데 주소도 모른다...
롤랜드 에머리히라고 주로 지구가 완전히 잠겨버리거나 뭐 타버리거나 해서 아주 망해버리게 하는 영화 만드는 것을 전공으로 하는 감독이 만든 영화가 바로 <2012>다. 이 포스터 만큼이나 거대한 화면과 효과들을 관객들의 얼굴 한복판에 뿌려댔던 영화였지.물론 넌 웃겠지.그게 무슨 종말이냐구.몇십 억 정도의 인류가 물 속으로 익사했다 하더라도 지구 자체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데,그게 무슨 결정적인 종말이 될 수 있겠느냐고 함박웃음스런 비웃음을 날리고 있을 거야.
그러나 이해해라.어떤 인간들에겐 자기 자신의 죽음만이 온 세상의 종말이다.또 어떤 인간들에겐 자기 동네의 몰락만으로도 세상종말의 심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거란다.그러니 네가 이해를 좀 해야 할 거다.
더구나 이 영화는 네 취향의 영화는 좀 아닐 거다.네가 출연했던 영화와는 거의 대척점에 서 있다고 봐야 무방한 헐리웃 출신의 영화가 아니겠냐.얘들 호들갑이야 알아주는 거쟎아.얘들이 툭 하면 지구를 망가뜨리고 도시들을 물 속에 잠기게 하고 온갖 괴물들과 우주의 생물들,그리고 심지어 애완동물들까지 동원해서 지구 멸망을 묘사해왔다는 사실 쯤은 너도 잘 알 거 아니겠냐.(그런 영화 안 봤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 주라)
게다가 얘네가 만드는 소위 '재난영화'라는 게 이젠 거의 쟝르의 수준이야.매뉴얼까지 있는 것 같아.아주 강직하거나 아주 비열한 정치인들을 함께 묘사하고,권력에 영합하고 약간 실력이 떨어지는 과학자들과 유능하지만 외로운 과학자들을 대비시키고,이혼을 했거나 별거해서 가족관계에 약간 이상이 생긴 가장과 가족들을 투입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족이데올로기들로 양념을 치고,거기다가 로맨스 하나 덤으로 집어넣고,맨 마지막에 거룩한 희생 몇 개를 첨가시키는 거.이게 헐리웃 애들이 만드는 재난영화의 수순들이야.
뭐,거기에 무슨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은 없어.내가 만든다 해도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지구를 지켜라> 역시 그런 혐의에서 100% 자유로운 건 아닐 거야.그건 아마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의 어떤 고전적인 유사성에 있을 거야.우리 두뇌 복판에 자리잡은 내러티브 생산을 담당하는 어떤 영역 말이야.
뭐,그렇긴 해도 <2012>는 좀 찌질해.네가 들으면 거의 거품 물고 기절할 수준이지 뭐.우선 노아의 방주를 만든댄다 글쎄.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돈 많은 넘들이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지구 자체가 물에 잠겨도 동동동 떠다닐 수 있다는 배를 만들어서,수십 억의 사람들이 모두 다 죽은 다음에도 새로운 지구를 만들어낼 희망의 불씨 하나를 남긴다는 거야.
가령 이런 거지.우리나라 인구 사천만명 중에 삼천구백구십구만구천명 정도가 우주로부터 습격해 올 재난에 몰살당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이명박이나 이건희나 정몽준이나 뭐 이런 노인네들이 지네 가족과 심지어 애인 등등등 만을 구하기 위해서 노아의 방주를 만든다는 설정인 거야.이런 시나리오를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좀 황당하지 않냐? 나 같음 또 그런 애들하고 한 세상 살아가야 한다면 그런 방주는 그냥 안 타고 죽는 것도 고려해 보겠다.
물론 나도 인간이야.어떻게 구석탱이 자리 하나라도 나서 은별이라도 태울 수 있을 수 있을 가능성이 생긴다면 머리에 핀 꽂고서라도 이리저리 뛰어다니겠지.그 와중에 몇몇이 죽거나 다친대도 ,일단 노아의 방주까지 가야 할 시간이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하겠지.
그런데 이 영화 <2012>가 제시하는 히어로- 재난영화에 항상 따라붙는 그 영웅 말야.프로야구팀 히어로즈말고-가 바로 이런 인물이야.존 쿠잭이 연기하는 그 인물은 영화 내내 불나게 뛰어다니면서,또 오만가지 운 좋은 일을 다 겪으면서 결국 자기 가족을 구해내고 말아.그 와중에 자기 가족 대신 죽는 사람이 몇몇 있지만 그게 크게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 같고,존 쿠잭 역시 그런 상황에 그렇게 실망하는 것 같지 않아.
그래 그 인간은,너하고 정반대 성향의 히어로지.지구 자체는 아무 상관도 없고 자기 가족만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니는 히어로.이 사람한테 지구의 종말은 자기 목숨과 자기 가족의 죽음일 뿐이야.지구에 대해 물어보면 아마 그럴 거야.
-지구?,지구가 왜?
물론 <2012> 영화 자체가 문명의 종말이나 인간애 같은 내용을 얘기하는 영화는 아니야.아예 그런 쪽엔 개념도 별로 없어.롤랜드 에머리히가 하고 싶었던 건 그냥 비쥬얼이었어.지구가 멸망당하는 그 광경을 초울트라슈퍼캡짱으로 보여주는 거.바로 그거야.그래 뭐,볼 만은 하더라.영화 속에 서울이 무너지는 장면이 없어서 약간 서운해질 지경이었어.(우리나라도 영화시장이 좀 괜츈할 텐데 말야.) 그런데 그것도 너무 길어지니까 좀 지루하더라.(글쎄,너라면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겠다.눈 초롱초롱 뜨고서 신나할 것 같기도 하고 말야)
롤랜드 에머리히가 제시하는 종말과 재난은 결국 비쥬얼이야.보여지는 재난,재난가능성의 가시성.그런데 우리는 편안하거나 불편한 의자에 앉아서 긴장감에 손에 땀을 쥐거나 지루함에 내내 하품을 하면서 그 종말을 보게 돼.그래 '보게'된다구.우리와 지구의 재난은 서로 분리되고 멀리 떨어져서 서로의 존재를 훔쳐 봐.우리는 재난과 종말을 프로야구시합처럼 소비하게 되고,결국 저 전지구적 재난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바보로 보게 되는 거지.
하지만 진정한 종말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아닐까? 4대강인지 대운하인지 하는 삽질 때문에 자연과 생물들이 맞게 되는 종말.그거 눈에 보이는 거 아니야.금전이라는 하나의 화두에 의해 지배당하며 무너지는 영혼으로 가득 찬 사회.그거 역시 가시적으로는 보이지 않아.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위력을 끼치는 재난만을 종말로 인정하는 법이거든.숲으로서의 몰락은 쉽게 느껴지는 법이 아니야.이런 종류의 쇠락을 스크린으로 보여 주는 영화가 바로 종말에 관한 영화겠지.
그런 의미에서,보이지 않는 가능성으로서의 지구종말을 진정한 재앙이라 여겼던 <지구를 지켜라> 속의 병구 너는 정말 탁월한 인물이야.너는 종말이 뭔지 알았던 넘이거든.아,<2012>속에서도 닥쳐올 종말을 대비하라고 예수 이전에 나타났던 선지자 세례요한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 하나 있긴 있어.우디 해럴슨이 연기하는 배역인데,롤감독은 우디 해럴슨을 똘끼 다분한 싸이코로 만들어 버리지.그의 의식 속,아니 헐리웃의 의식 속에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들은 그저 상궤를 벗어난 아웃사이더일 뿐인 거지.그들은 보여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일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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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느라 피곤하진 않냐? 사실 재난영화가 하나 더 기다리고 있는데,일단 오늘은 예서 멈추자.오늘은 빨리 일을 끝내고 가야 할 곳이 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