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독립영화들 PART2 <낮술> 그리고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로 멈췄던 글들을 다시 시작하려 한다.이렇게 누군가 떠나고 누군가 비극적인 사건을 겪어도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흘러가는 것이다.또 한 번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2주 전,나는 봄에 보았던 몇몇 독립영화들에 대한 글들을 준비하고 있었다.그런데 벌써 여름이다.봄 영화를 쓰자니,솔직히 좀 면구스러워지는 면이 없지 않은데,사실 내 글을 오래 읽어 온 분들이라면,내가 그런 타이밍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아실 것이다.(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뻔뻔해진다) 그래서 그냥 다시 시작한다.그 때 글을 멈췄던 지점은 이충렬 감독의 <워낭소리>였었다.
4.낮술(2008 노영석)
<워낭소리>가 정서를 통해 관객들에게 접근하는 영화라면,<낮술>의 접근법은 한마디로 풍자다.풍자란 뭔가를 비틀고 또 뭔가를 드러내는 일종의 기술적 방법으로서,엄밀한 지성이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풍자 속에 드러나는 지성은 또한,영화 속에서는 영화적 문법이나 영화적 구조로 표현된다.구조에 대한 성찰이 없이,그냥 욕만 늘어놓아서는 '풍자'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보다는 다른 쟝르 쪽이 풍자엔 훨씬 유리하다.내 생각엔 글이 가장 편안한 풍자의 도구이자,가장 위험스런 풍자의 무기이다.그에 비해 영화는 영화에 들어가야 할 비용이 매우 높고 의미의 왜곡이라는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그래서 실패한 풍자영화들의 리스트는 차고 또 넘친다.그러나 그래도 영화 속 풍자는 지속되어야 한다.특히 독립영화에겐 그래야만 할 당위성이 있고,메이저 영화들에 비해서 풍자의 가능성과 범위가 더 확장되어 있다.인디가 괜스레 인디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영화 <낮술>이 풍자하는 것은 정치권력이나 거대 언론이 아니다.가진 자들의 욕망을 은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낮술>이 조준하는 지점은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어쩌면 우리 자신,우리 자신의 비루함,왜소함,사소한 욕망들이다.특히 평범한 남자들이 가지는 일탈에 대한 팬터지를 나름대로 해부해서 관객들의 눈 앞에 요리해 내놓고 있다.
문제는 <낮술>이 영화적으로 선택한 전략이다.그 전략에 따라 영화의 품격이 결정된다.(완성도라는 말은 쓰기 싫다) 게다가 <낮술>에서 수행하고 있는 종류의 풍자는 꼭 영화가 아니더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그래서 문제는 문법이며,어떤 형태의 수사와 몸놀림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느냐가 오히려 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언뜻 보기에 <낮술>이 사용하는 무기들은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타나는 우연과 착각이며,일상에서의 일탈이라는 특수하지만 범상적인 환경 아래 거듭되는 술자리와 여인들,그리고 잊을만 하면 내뱉어지는 똑같은 욕설들이다.영화는 그래서 지하철 순환선 같은 한 회로를 만들고 있고,그 회로는 마치 프란츠 까프카의 그것을 연상시킨다.더구나 이 영화는 로드 무비이다.그러나 거기에 가미되는 블랙 유머가 이 영화의 매력 하나를 더 하고 있고,이로써 관객은 영화의 폐쇄성을 유연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이렇게만 말하려니 좀 이상하다.약간의 스포일러가 가미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머,용서하시라)
이 영화의 주인공은 최근 실연당한 찌질남이다.20대 후반쯤으로 보이며 특별한 직업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평범한 외모에 소심하기 이를 데 없는,언제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젊은 남자다.실연을 위로한답시고 만난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강원도 펜션으로의 동반여행을 제안하지만,막상 강원도 정선에 나타난 사람은 예의 그 소심남이 유일하다.친구들은 그와의 약속을 완전히 무시했다.이제 그는혼자서 동떨어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그의 고난에 찬 황당한 여정이 시작된다.그는 엉뚱한 펜션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신다.(그는 그 펜션이 예약된 펜션이라고 착각한다) 술을 마시다 옆방에 혼자 묵는 것 같은 여자에게 관심을 갖고 (아주 사소하지만 이런 종류의 에피소드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리얼한 사건이다),그녀에게 와인을 선물하러 갔더니 동행한 남자가 있다.돌아선다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 그는 또다시 상황을 오해했다)
다음날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예의 옆방녀는 그에게 술을 마시자고 제의하고,추운 버스 정류장에서 그들은 술을 마신다.갑자기 남자친구가 나타나고 그녀는 또 떠난다.바닷가엘 갔더니 이 커플을 또 만난다.그들은 또다시 낮술을 마시고 노래방엘 가고 ,옆방녀와 우연한 키스에 이어 섹스까지 간다.그러나 그들은 도둑들,그는 팬티 하나만 달랑 걸친 채,길가에 버려진다.약을 탄 술을 마셨던 것이다.
떠난 남자의 로망은 이렇게 박살난다.그를 구제하는 건 건장한 트럭 운전사다.그런데 또 그가 황당한 사람이다.트럭 운전사는 그를 성폭행하려 하며.우리의 주인공은 그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영화는 이렇게 찌질한 한 젊은이의 조금은 유머러스하기까지 한 고생담을 훑어가며 진행된다.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여기까지만 한다.그렇게 그렇게 하다가 끝을 낸다.목표가 거의 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그런데 <낮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다시 똑같은 회로 속으로 또 진입한다.지칠 줄도 모른다.그는 원래 가야 했던 펜션을 결국엔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또다시 낮술을 마시게 되고,또다시 술에 취하고 여인을 욕망하고,착각과 오해의 순간이 오게 되고,거기서 잠깐 벗어난 듯 보이며 서울로 귀환한다.
물론 영화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그는 다시 바닷가로 가는 길을 물어보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또다시 정선의 버스터미널이다) ,관객들은 또다시 그가 그녀를 따라 바닷가로 가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따라서 영화는 전혀 끝나는 것이 아니다.영원한 순환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이 회로의 반복이,그저 반복에만 그치지 않도록,그래서 우연한 에피소드에 끝나지 않도록,노영석은 에피소드적 장치 몇 개를 영화 곳곳에 심어 놓는다.어쩌면 좀 예외적이다 싶게 등장하는 중년 여인 캐릭터가 있다.(이 여배우는 이 영화의 조감독을 겸하고 있다) 정선의 터미널에서 사진을 찍어달라며 접근한 이 여인은 (바로 <봄날은 간다>가 촬영되었던 그 장소다) 강릉 가는 시외버스에서도 다짜고짜 우리의 소심남에 바로 옆자리에 앉고,피곤한 그에게 시를 읊어대다가,그가 외면하자 바로 욕을 한다.
- 개 같은 새끼.
- 좃 같은 새끼.
물론 대놓고 하는 것은 아니다.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하지만 그야말로 황당무개한 상황이다.입장을 바꿔 봐라.생면부지의 여자가 옆자리에 앉아 쌍욕을 해대는 상황을.여인의 욕설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여인은 자꾸만 그에게 나타난다.그가 팬티 바람으로 떨다가 히치 하이크하려는 차량을 운전하는 것도 그녀다.차를 태워달라는 그에게 그녀는 또 똑같은 욕설을 퍼붓는다.그리고는 떠나버린다.그녀의 욕 퍼레이드는 예서 멈추지 않는다.한 번 더 한다.그녀는 그가 가야 했던 펜션 주인의 사촌동생이며,낮술자리에 한 번 더 동석한다.
그녀는 노상방뇨하려는 그의 뒷쪽에서 갑자기 나타나,그의 드러난 성기를 훔쳐보려다가 또 한 번 욕을 퍼붓는다.예의 그 욕설을 말이다.
여인의 욕설은 매우 황당한 상황에서,욕하고는 매우 걸맞지 않은 상황에서,최대한도의 혐오와 모멸감을 담아,아주 면전에서 자행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이 욕설은 이 영화에 있어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이 짧고 굵은 욕들이 아니었다면,영화는 아마 괜한 일탈 내지 또는 사람들의 인생에 있어서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따라서 받아들여지기가 쉬운 한 청년의 유머러스한 고생기 쯤으로 읽혔을 것이다.그렇게 되었다면,이 영화의 풍자 게이지는 아마 제로에 가까운 지점으로 떨어졌을 것이다.그러나 욕설 두 마디가 영화에 결정적인 방점 하나를 제공한다.
욕설로써,영화는 자꾸만 상황을 환기시킨다.환기란 무엇인가? 찬 바람을 들여보내 기존의 공기를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극장의 창문을 여는 장치가 바로 여인의 욕설인 것이다.이 욕들은 관객들이,그들의 주인공의 우연을 가장한 찌질한 욕망,그리고 일탈처럼 보이는 가련한 욕구들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순간,영화 속 그와 관객 자신을 동일시해서 그의 입장에 공감하려는 순간,그들의 뒷통수를 죽비처럼 내려친다.
영화는 여인으로 하여금 시를 읊게 하고 예술을 논하게 함으로써,남자들의 생래적인 바보스러움에 강렬한 대조 효과를 가지게 한다.이렇게 희한한 장치 하나가 숨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결정적인 중요성 하나를 획득한다.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너희가 바로 이런 놈들이야,이 찌질한 놈들아...
그래서 이 영화의 나름 클라이맥스라 말할 수 있는,야외 낮술 장면- 들판에서 벌어지는 더 이상 찌질할 수 없는 술자리-에서 여인은 일찌감치 제외된다.이 낮술 장면은 그야말로 바보스런 한 판의 술자리로서,멋도 없고 대단한 담론이 오가지도 않으며,심지어 술 취한 펜션 주인은 정체불명의 노래와 춤사위를 선보이고,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가로챘다는 또다른 오해 아래 주먹다짐을 벌이기
까지 한다.
이렇게 또 저렇게 이 영화는 우리 자신의 사소한 욕망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로 자리잡는다.물론 남자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법이 겨우 이런 것이라면,우리나라 남자들은 상당히 한심스런 존재들이 되고 말며 소위 한국남자의 범주 속에 든 사람 입장에서는 좀 힘이 빠지는 일이 되기도 한다.게다가 이 영화의 남자들에겐 확실한 정체도 없다.계급성도 없다.소위 88만원 세대의 남자들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건 역시,남자들 입장에선 변명꺼리가 충분하다.차라리 더 음습한 욕망들이 주된 타겟이 되는 것이 옳지 않았는가,하는 생각도 든다.그런데 왜 하필 그들이 표적이 됐느냐구? 대답은 간단하다.제작비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며 (제작비가 1000만원이란다),감독의 경험이 토대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만에 보게 되는 상당히 괜챦은 블랙 코미디가 <낮술>이었다는 것에 이의를 달긴 어렵다.이 감독의 다음 영화가 기대되는 이유다..
5.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부지영 2009)
아예 영어 제목을 Sisters on the road라고 이름 붙인 이 영화 역시 낮술처럼 일종의 로드 무비이다.그러나 똑같은 독립영화의 외피를 쓰고 있으나,영화의 연출기법이나 스토리 텔링의 안정적인 기조 (때로는 안이함으로까지 비추어지는) 는 마치 메이저 영화의 그것과 흡사하다.
특히 공효진과 신민아라는 20대 여성의 패셔니스타 아이콘을 자매로 캐스팅해서,그들간의 대조를 통해 개성을 서서히 드러내는 연출기법은,앞서 말한 <낮술>과는 완전히 판이한,거의 다른 우주에서 탄생한 영화로 보일 정도이다.
제주도에서 생선가게를 하는 공효진과 (생선가게 아줌마로 나와도 여전히 예쁘다 거의 비현실적으로 보일 정도로) ,서울의 커리어 우먼으로 등장하는 신민아를 배다른 자매로 등장시켜서,그들의 과거사를 추적하는 것이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아주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거나 삶의 특유한 본질을 파고 드는 영화는 아니다.거대한 스펙터클을 통해서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거나 복잡다단한 복선과 이야기의 결정적 반전을 통해서 관객들의 마음을 기습하는 영화는 더더구나 아니다.
아주 부드럽고 편안하며,유장한 흐름을 통해 사람들 (이 영화에서는 자매) 사이의 감정과 관계들을 젠틀하게 포착하고 있는 소품스러운 영화라고,아주 단순하게 얘기할 수 있다.엄마하고 보기에,언니하고 보기에, 적격인 영화다.(남자 혼자 앉아 보기에 좀 쑥스러워질 정도로)
자매들 특유의 갈등과 싸움과 감정의 순수하면서도 복잡한 교류를 통해서 가족 관객들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이런 스타일,이런 부드러운 소품들,특히 여성들의 버디 무비가,현재 우리나라의 텔레비젼과 영화예술의 빈 공간이다.<지금 이대로가 좋아요>는 바로 이 빈 공간에 위치해 있다.그러나 지금은 비어버린 이 빈 공간엔 사람 사는 향기가 있고 사람 사이의 화해와 커뮤니케이션이 있다.(우리 사는 세상이 그렇듯 말이다) 삶과 행복,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며,그 모든 감정의 양태들이 무리없이 재편성되어 스크린 위에 투사된다.아주 안정적으로 말이다.
이 영화는 과거 텔레비젼에서 가끔 방영되었던 소위 시츄에이션 드라마,문예 드라마,TV 문학관을 연상케한다.지금은 사라져가는 쟝르들이다.설날이나 추석에 특집극으로나 편성이 가능한 드라마들이다.<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가치는 그런 종류의 드라마들의 복원이라는 데에 있다.
물론 이 영화에도 TV의 막장 드라마들처럼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가 있다.그러나 이 영화엔 TV 드라마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억지나 폭력성이 없다.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렇게 간다.그렇다고 관객의 허를 찌르거나 무릎을 치게 만드는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좋은 종류의 반전만이 영화 말미에 자리잡고 있다.그리고 조용하고 쿨한 영화적 결론으로 관객들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해피 엔딩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아직도 개봉 중이므로 (서울의 단 한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얘기를 덧붙이긴 좀 어렵지만,참 좋은 로드 무비이며 ,사이가 좋지 않은 친구나 자매가 있다면 꼭 가서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박쥐>의 피로감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박카스 같은 영화다...
이 두 사람,드디어 배우의 길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