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 PART2- 한나와 책
사실상 우리들의 삶은 많은 하잘 것 없고 지루한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가끔 우리는 우리 삶에서 정말 불꽃 같고 화려한 어떤 시간을 맞이하게도 되지만,인생이 그러한 순간들로만 점철되어 있다면 그 과도한 에너지를 올곧이 견뎌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 역시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그들의 삶도 사실은 지리한 일상들과 어쩔 수 없이 치뤄내야 할 갖가지 의무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그런 시간들을 모조리 카메라 속에 담아내야 한다면,영화 역시 느려지고 지지부진해질 것이다.물론 그런 순간들을 일부러 가득 담아 주인공을 미시적으로 분석하는 영화들도 있다.그러나 우리 평범한 관객들은 아무래도 그런 영화들에 익숙해질 수 없다.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긴장감을 요구하는 작업임으로,거기에 적응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린다.
따라서 대부분의 영화감독들은,자신의 주인공의 일대기를 영화 속에 옮길 때,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영화 속에 배치해 놓는다.그것은 일종의 재배치로서,유능한 감독들은 이런 재배치의 패턴만을 가지고서도 자기가 할 말을 다 할 수 있고,자기 주인공의 삶을 강력하게 조명하는 능력을 가진다.
우리의 영화 <더 리더>의 또다른 주인공 한나 슈미츠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며 감독 스티븐 달드리가 제시하는 순간은,그녀가 나치 친위대 전력 때문에 피고로 불려 나가 재판 받는 그 순간과 그녀가 최종적인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자기 인생에 마지막 정리를 단행하는 시간이다.한나는 이 두 가지 순간을 통해서,그녀가 하고 싶었던 얘기,실제로 그녀가 자기 인생에 가졌던 감정을 관객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1.법정의 한나
법정에서,그녀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버린다.법의 눈에서 바라볼 때,그녀의 모든 이력은 확신범의 이력으로 변질된다.그녀는 원래 지멘스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였으나 공장 경영진이 그녀를 육체노동자가 아닌 관리직으로 승진시키려 하자, 미련 없이 공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찌 친위대인 SS로 이직했다.사실은 그녀가 자신의 선천적 약점인 문맹을 감추려고 시도했던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법의 객관적인 눈으로 그 일을 감안해 보면 사안은 완전히 변질된다.그녀는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어' 자신의 일자리를 자발적으로 박차고 나온 셈이 되는 것이다.마치 일제시대 박정희가 '일본 황군에 들어가고 싶어' 교사 자리를 박차고 만주로 향했듯이 말이다.(단,박정희는 결코 문맹이 아니었다)
재판에서,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향한 죽음의 행진에 연루된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인정한다.그녀는 죽음을 앞둔 소녀들을 '스스로' 선발해서 자신의 방에 재우면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했다고 시인한다.그 소녀들은 얼마 안 있어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게 될 아이들인데, 한나는 자신의 그 행위,-마지막으로 음식과 편한 잠자리를 제공하고 책을 읽게 하는- 가 그녀들에 대한 호의이거나 마지막 배려라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그저 새로 수용소에 들어오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 공간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한다.한마디로 가공할 만한 진술이다.무죄를 주장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정당성을 주장하려는 설명이다.
그녀는 이렇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담담하게 서술하기만 한다.어떤 변호나 변명도 시도하려 하지 않는다.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그러면서 또 자신의 '유죄'도 인정하지 않는다.오히려 '판사님이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반문한다.(판사는 대꾸하지 못한다)
그녀는 오직 자기 '업무'만을 수행했다는 것이다.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어쩐지 완전히 무감각한 (apathic),그리고 감정 조차 가지지 않은 연쇄살인자의 그것을 연상시키면서 법정 안의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든다.유죄를 미리부터 상정하고 진행되는 이러한 재판에서,그녀는 죄악이나 도덕 감정 쪽엔 아예 개념 조차 가지지 않은 최악의 인물로 변해 가는 것이다.
그녀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사건,- 끌려가던 유태인들을 가두어 놓은 교회에서 발생한 화재사건 때,교회의 문을 제 때에 열어놓지 않아,대부분의 수감자들을 사망에 이르게 하는 사건- 의 경우에도,그녀는 '문을 열면 벌어지게 될 무질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즉 자신이 상부에서 부여받은 임무는 바로 질서의 유지였기 때문에,사람들을 죽음의 상황에 그대로 방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런 그녀의 진술들은 다른 피고인들로 하여금 그녀를 이 살인극의 주모자로 몰도록 하기에 충분한 동기를 주었고,일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어갔다.또한 한나는 또 한 번 자신의 문맹을 감추기 위해,그녀들을 비롯한 친위대원들이 작성했던 거짓 보고서의 필적감정을 거부하며 자기가 그 보고서를 주도적으로 작성했다고 자백하여 무기징역을 받는다.
단지,자신의 글을 읽고 쓸 수가 없다는 걸 감추기 위해서 그녀는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것이다.이것이 현실에서 가능한 일일까?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그렇게도 수치스러운 일인 것일까? 무기징역을 감당할 정도로?
3.자살의 한 양식-한나와 책
문맹으로 인한 무기징역,또 책에 대한 기묘한 집착.이것은 이 영화에 있어서 실로 교묘하게 작동하는 장치이다.영화는 한나란 인간의 배경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그녀가 받은 교육의 정도,그녀의 부모와 친구관계 같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파악하는 척도가 될 만한 사항들에 대해서 영화는 그 어느 정보도 제시하지 않는다.오로지 주어진 일들만을 성실하게 이행했던 사람으로만 묘사한다.영화는 그저 그녀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제시하고 ,그것이 그녀 인생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만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그녀가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책이나 문자를 통해서 일반적으로 주입되어야 할 교양이나 가치관들이,한나에게는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한나는 문명적인 백치 상태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태생적인 변호장치로 작동한다.즉 한나는 완벽한 백치 같은 성향의 캐릭터이다.그래서 완전히 비현실적인 위치에 그녀를 존재시킨다.이것은 다분히 고의적인 장치이며,그녀를 이토록 기이한 위치에 놓아둔 것 행위 자체가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영화는 거의 숨기지도 않는다.
소설과 원작은 이것만 가지고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또다른 상황들을 제시한다.그것은 한나가 가지는 기본적인 감성 같은 것들이다.
한나는 마이클과의 짧은 연애 시절에,그가 읽어주는 책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끊임없이 감동하고 적절하게 반응한다.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울 줄 알고,기쁜 이야기를 들으면 웃을 줄 안다.심지어 로렌스의 '챠탈레이 부인의 사랑'을 들었을 땐 적당한 혐오감을 표시하기까지 한다.현실이 아닌 비현실의 세상-바로 책- 속에서의 그녀는 적절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자아낼 줄 아는 것이다.
마이클과 떠난 자전거 여행에서 그녀는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는 아이들을 본다.그녀는 그 노래를 들으며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린다.바로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을 수용소의 가스실로 보냈던 그녀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죄업에 대한 죄의식 때문이었을까? 죽은 소녀들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다.그녀는 결코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그러나 책과 음악 속에서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예술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그녀의 문맹 상태를 은유하는 에피소드들이라고 생각한다.그녀야말로 책-문명-의 손길이 거치지 않은 백지,Tabula rasa의 상태에서 완전한 아이로 존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섹스할 줄 아는 아이 말이다.그녀가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그녀가 아이 상태였다는 것,그래서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몰랐다는 것,바로 그것이다.따라서 작가는 독일의 전쟁세대 사람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며 그들을 은근히 두둔하는 것이다.(여기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룬다)
이런 인물에게 마이클은 책을 읽어 준다.그리고 또 한 번 '책'이 그녀 인생의 어떤 부분을 건드려 버린다.한나가 교도소에서 글을 깨친 후 읽었던 책들은 로맨스 소설만이 아니었던 것이다.오딧세이나 체호프 뿐만이 아니다.그녀는 결국 나찌 관련 서적,당시에 피해자들의 증언이 담긴 책들을 모조리 다 읽는다.이젠 문명이 그녀에게 책읽기를 통하여 그녀의 과거를 재구성해 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그녀는 책들이 얘기하는 당시의 진상을 읽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유죄를 깨닫게 되었는가?
마이클은 바로 그 최후의 질문을 한나에게 던진다.마치 전후세대가 전쟁세대의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 같은 것이다.
-한나,그동안 (교도소에서 책을 읽는 동안) 무엇을 깨달은 거에요?
이 질문은,한나가 마이클에게 자신의 과거 죄업을 속시원하게 인정하지 않은 다음에 던졌던 질문이다.그러자 한나는 대답한다.
- I've learn to read( 난 읽는 걸 배웠어)
한나는 자신의 백지 상태 영혼에 드디어 인류가 쌓아왔던 문명들을 ,마이클이 준 책을 통해서 그려넣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그녀는 결코 자신이 과거 저질렀던 나찌 시절의 일들을 분명한 단어로 규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결론을 스스로 보여 줄 뿐이다.
즉,그녀는 자신이 교도소에서 빌렸던 책을 책상 위에 쌓아 놓고,그 위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이다.그녀는 끝까지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잘못한 것은 바로 '책'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한때 그녀 인생의 기쁨이었던 것,그 '책'의 또다른 정체는 인류가 쌓아올렸던 문명이었다.그녀는 그 문명에서 제외되어 있었고,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바로 그 '책'에서 읽었던 유태인들의 비극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무죄를 그렇게까지 소리높여 강변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가르쳐 주었다.그녀는 그 틈바구니 사이에 끼인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며,결국 자신을 규정하고 단죄하는 '책' 그리고 '사회' 전체에 항의의 메세지를 던지는 것이다.그래서 한나는 '책'들을 밟고 올라가 자살하는 것이다.
백치인 한나의 자살은 현대의 문명을 야유하고,그렇게 잘 난 책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숱한 폭력과 죽음을 낳았던 과거 세계에 비현실에 화살을 날리는 일이다.
물론 이런 해석은 어쩌면 무의미하고,또 지나치게 과대포장된 생각일 수도 있다.게다가 스티븐 달드리와 원작 소설가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또다른 종류의 주제- 전쟁세대와 전후세대간의 문제- 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한나를 '문맹'으로 설정했다는 것 자체가,그 세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그러나 한나의 문맹을,문맹 그 자체로 볼 때 그녀의 자살은 또 하나의 야유로도 읽힐 수 있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베른하르트 슐링크나 스티븐 달드리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것이다.그러나 그들은 주인공 여배우를 잘못 섭외했다.케이트 윈슬렛의 지나친 열연이 새로운 지평과 관점들을 관객들에게 선사했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