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다.<미이라 3>
아내와 내가 영화관에 가기 위해서는,반드시 충족되어져야 할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바로 은별이.누군가 천사 같은 사람이 우리가 극장에 앉아 명멸하는 스크린의 빛들을 마주 대하고 있는 순간,은별이를 돌보아 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나 최근엔 천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과거 우리의 단골 천사였던 처남은,결혼해서 분가해 버렸고 양가의 부모님들은 다시 찾아온 황혼의 청춘들을 즐기시기라도 하는지,오히려 우리보다 더 분주하시다.
그래도 어디엔가 천사는 있다.은별이를 맡기고 극장 앞의 매표 창구에 서자,우리는 좀 멍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도대체 무슨 영화를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며 다투기 시작했다.나는 <놈놈놈>을 보자고 했으나,아내는 '왜 당신은 한사코 재미없는 영화만 보자고 하는 거냐'고 나를 타박했다.도대체 누가 그 영화를 재미없다고 했느냐고 반문하자,아내는 그 영화를 본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대답했다.도대체 아내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인지,주변 인물들의 캐리커쳐를 떠올리고 있는 내게 아내는,요사이 자신의 컨디션이 그리 좋지 못하며 거기에 약간의 우울모드에까지 빠져들고 있으니,뭘 생각하고 자시고 하는 영화 보다는 그냥 깨고 부수고 하는 타임킬링용 영화가 보고 싶을 뿐이다,그러니 그냥 <미이라>를 보면 된다고 말했다.나는 속으로 <놈놈놈>도 그런 영화일 거라고,그리고 왜 하필 '깨고 부수는 영화를 보아야 우울증이 가라앉는단 말이냐'고 볼멘 대꾸를 하려다가,재빨리 지갑을 꺼내 들고 매표구의 아가씨에게 영화의 상영시간을 묻는 아내를 보자,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은별이가 약간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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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이라>가 벌써 세 편이나 제작되었다는 사실에,난 우선 놀랐다.그리고 1편과 2편에 대한 가물거리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노력했으나,거대한 이집트의 모래더미들과 사막의 바람들,코가 큰 주연배우 브랜든 프레이져 - 난 그의 얼굴을 보면 언제나 꼭 '변강쇠'를 떠올렸다- 의 모습만 아른거렸다.
내 아른거리는 기억과는 상관 없이,영화의 시간은 꿋꿋이 흘러가고 있었는데,무대는 중국이었다.베이징 올림픽을 노리고 만들었냐,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갑자기 화면에 이연걸이 모습을 나타냈다.이연걸은 나름 진시황을 모델로 한 중국의 거친 황제를 연기하고 있었다.안 어울리고 안쓰러웠다.옛날의 황비홍이 왜 저렇게 낯선 곳에서 분투하고 있는지,아득한 기분이 되어서 쳐다보고 있는데,이번엔 양자경이 등장한다.
<예스마담> 시절의 그녀- 그때가 1980년대 중후반이었을 것이다- 를 기억하는 내게,007의 본드걸을 거쳐서 <와호장룡>의 우아하면서도 순정을 간직한 무사를 연기했던 그녀는 이상하게도 정겨운 누나의 이미지로 느껴진다.
어떤 관객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예스 마담의 변신은 그녀의 달라진 얼굴 만큼이나,내겐 세월과 변화에 관한 짧은 생각들을 안겨 준다.
이랬던 그녀가,
이렇게 변해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을 틈은 없다.헐리웃 블록버스터가 원래 그렇듯,영화는 쉴 새 없이 '치고 빠진다'.
도대체,왜 남의 나라 유물들을 함부로 파내고 있는 건지 저런 어이없는 도둑놈들이 다 있나,하는 생각이 들 때 쯤엔 요란한 카레이스 한 방이 터지고,놀랄 만큼 엉성한 편집에 짜증을 낼라 치면 이번엔 폭탄 여러 방이 빠바방 터지고,갑자기 난 데 없는 비행기가 나타나 어처구니 없는 우연에 의거하여 주인공 일행을 구해내서 관객들을 허탈의 늪 속으로 빠져들게 할 때 쯤엔 ,이제는 익숙해지까지 한 들판의 대규모 전투씬이 등장한다.
그렇게,그렇게 영화는 간다.그리고 익숙한 해피 엔딩들- 가족들의 재결합,사랑과 평화의 회복,그리고 여전한 일상으로의 복귀와 모험의 일시적인 종료,게다가 요사이의 새로운 추세인 속편을 위한 적당한 실마리- 로 끝이 난다.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관객들은 웅성거리며 집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한다.스포일러 조차 없이 리뷰도 끝이 난다.
아내는 속삭인다.
-만화다,만화..
- 스트레스는 풀렸어?
-응.그저..
-블록버스터라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래,그래도 시간 죽이기엔 딱 좋아.
-그래도 이연걸을 주먹으로 제압하다니 너무 했어.
-지네들 맘이지 뭐..
앞서 걸어가던 아내가 순간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본다.약간 화난 눈빛이다.
- 자기..뭐라고 하지 마.
-뭘?
-별로인 영화를 골랐다고.
<미이라>를 고른 책임을 자신에게 묻지 말아달라는 아내 특유의 강압적인 태도다.
-난 아무 말도 안했는데?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아내를 마주 본다.
-그리구..그렇게까지 재미 없진 않았쟎아?
-그래도..좀 아닌 건 아니지.
-아유,됐어 됐어..
아내는 손까지 휘저으며 내 말을 막으려 든다.
-무슨 얘기 할지 뻔히 아니까.고마 해 고만..어떤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저런 영화를 좋아해.당신 보기에 아무리 형편없는 영화라도,재밌게 보고선 입소문을 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아마,정말 영화가 재미가 없긴 없는 모양이었다.평소의 아내는 이렇게까지 길게 말하는 법은 없었다.
-누가 뭐랬나?
-뭐라고,할려고,했쟎아.
그렇다.뭐라고,할려고,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런 종류의 대화가 언젠가 어디에서 일어났던 내용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도 영화를 좀 여러 개 보았다는 사람들이,또 뭘 좀 많이 안다는 사람들이,자기들 보기에 허접해 보이는 영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이라도 할라치면,으레 다가오는 대답은 주로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그저 즐기기 위해,눈 감각의 쾌락을 위해,저렴한 돈으로 여가 시간을 메꾸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 뿐이다.거기엔 어떠한 잘못도 없다.게다가 나는 그 영화가 어느 정도는 재미가 있었다.흠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약간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그렇다고 해서 '그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을' '그 영화가 재미있었다고 얘기한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바보 취급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된다.
-도대체 너 따위의 현학이 내게 무어란 말이냐..도대체 넌 누구냐? 왜 너의 관점을 내게 강요하는 거냐?그것이야말로 일종의 파시즘이 아니냐..
아내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돈이 아까워질려고 하는 사람한테,그 영화가 이러니 저러니 하다고 말하는 건 정말 별로란 말야..나는.
-응,그래 아무 말 안할게.
나는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있긴 있었다.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 그러나 인생은 짧아.
우리가 일 주일에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고 치자.(그 정도만 해도 내겐 과분하고 감지덕지다) 그러면 일 년에 50개 정도다.그렇다면 우리가 일생동안 볼 수 있는 영화는 몇 편이나 될까? 고작해야 천 개에서 이천 개 사이가 되겠지.그 정도면 굉장히 많은 숫자가 아니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그 기간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영화들의 수에 비하면 어쩜 아무 것도 아닐 거야.그 많은 영화들 중 고작 이천 개의 영화만을 고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난 심한 허기와 또 심한 불안감을 느껴.
-내가 한 개의 잘못된 영화를 고를 때,내 귓전으로는 내가 보아야 했을 백 개의 영화들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리니까.그럴 때면 난 억울하고 분해.영화 뿐만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야.허접한 책을 읽느니 안 읽는 게 차라리 낫다고 나는 생각해.왠 오버스런 소리냐고 하겠지만,난 어쩐지 우리가 이젠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이젠 그 정점에서 내려오는 인생의 느지막한 내리막길에 놓여있다고 생각해.한 눈을 팔 시간도 없고 게으름을 부릴 여유도 없어.왜냐하면 우린 이미 '스피드 레이서'거든.
- 과거엔 ,우리가 아직 젊다고 느낄 때에는,영화를 보는 우리는 그 영화를 '읽어내려'고 노력했어.그 영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비밀스런 함의,수많은 이미지들을 깨닫고 먹어치워서 ,그 영화를 파악하고 소유해서 우리의 공간을 넓히고 장식하려고 했었어.마치 책장의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는 것처럼 말이야.어찌 보면 참으로 부르죠아적인 사고방식이지.우리 자신의 소유감각을 위해서 극장엘 들어가는 셈이었으니까.
-하지만,지금은 다르쟎아.우리는 이미 늙었쟎아.그래서 우리는..이제 지금의 우리는 영화들을 '순례하고' 있는 거야.그 여전한 미로들 속에서,우리는 우리를 찾고 있는 거야.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알아버리지.아아,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라는 것을.그래서 어떤 영화는 우리에게 존재증명인 거야.그리고 난 내 존재증명을 위한 시간이 아직 더 필요해.
-그런 의미에서 <미이라>같은 영화는 힘의 낭비이고 쓰디 쓴 후회의 시간이야.인생이 이미 짧아졌기 때문에,우리에게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우리는 <미이라>에게 욕을 퍼부어야 해..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미이라>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 될 거라는 사실은 자명해.강요가 될 수도 있어.엘리트 주의의 산물이 될 수도 있고.(그렇다고 내가 뭐 잘났다는 소린 아니지) 그러나 그 영화가 심지어 '재미조차' 없다면 어떻게 해야 겠어.인생은 짧은데 말이야..태도와 설득력에 신경을 쓰면서 우린 주절거릴 수 밖에 없지..
주차장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하나 더 볼까?
-무슨 영화?
-다크 나이트.
-배트맨 시리즈라는 건 알지?
-무섭나?
아내는 공포영화를 참으로 혐오한다.
-안 무서울 거야.
-보증할 수 있어?
-모든 종류의 보증은 싫어.
-가자..
우리는 또다시 매표구로 향했다.인생은 짧은 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