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정체에 대해 떠들기

짧은 여행의 기록 PART2

폴사이먼 2008. 5. 29. 16:00

퇴근하면,아내를 데리러 아내의 직장 쪽으로 간다.아내의 일터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데,그녀의 직장 바로 바깥 쪽에서는 매일밤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문화재가 열린다.우리는 언제나 한 시간 쯤 촛불을 들고 앉아있다가 은별이를 데리러 집으로 간다.아내와 아내의 직장동료들은 화를 내고 이명박씨를 향해서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지만,난 오히려 조금은 담담한 편이다.약간 오래 살았는지,난 이번의 이 일들의 결과가 정말로 중요할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5년 내 겪을 수많은 싸움들 중,예측보다는 훨씬 일찍 시작했을 뿐인 첫번째 싸움이다.저들은 이쪽의 에너지를 탐색하며 초장부터 기를 꺾어놓을 궁리를 한다.과거에도 그랬으며 앞으로 5년간 내내 그럴 것이다.색깔,폭력,배후..진화해보지도 못한 과거의 레퍼토리들을 그대로 사용해가면서 그들은 시민들의 전력을 탐색하고 있다.낯익은 풍경이다.데쟈부다..사람들은 10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있다고 말하지만,그런 것을 떠나서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것은 '이제는 성공해야 할 1987년'일 것이다.성공의 의미가 너무나 많은 층위에서 생성되겠지만..

 

이렇게 오만할 것이라고,이토록 뻔뻔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고 놀라진 말자.다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놀란 척 할 필요도 없고 비분강개할 필요도 없다.예정된 일일 뿐이며,또 예정된 일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다만 분명한 한 가지..이명박씨는..그리고 그의 정부는..전혀..실용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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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남도여행기를 쓰고 있을 필요가 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고,또 그래서 쓰지 않았지만,또 써도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앞으로의 긴 여정을 준비하듯 말이다..그래서 다시 써내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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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벌교를 선택한 것은,단순히 벌교가 고흥보다 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 만은 아니었다.벌교는,내게 아주 낯선 곳이 아니었다.이제 십 년도 넘어버린 어느 시절,난 이 곳 벌교에서 두 달 동안 살았던 적이 있었다.읍내에 위치한 어떤 작은 의원의 연로하신 원장님이,건강상의 문제로 약간의 휴식을 취해야 했으므로,이른바 대진의사(대리진료의사)라는 명목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던 것이었다.

 

그렇게도 멀리 떨어진 곳까지 일하러 갔던 이유는,그렇게도 멀리 떨어진 곳까지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당시의 나는,우선 사랑에 실패하기 직전이었다.누구나 한번쯤은 지진이나 해일 같은 사랑에 빠져들기 마련이고,그런 종류의 사랑일수록 비극으로 끝나기가 십상이라는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었던 것이다.그밖에도 더 많은 모종의 이유들 때문에 -이제 와서 구구절절하게 설명해본들 무엇하겠는가.- 난 곧 거의 이민이나 다름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유학을 떠나기 직전이었고,그 떠나는 시점까지의 남는 시간을 메꿨던 것이 바로 이 '떠돌이 알바'였던 것이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그렇게까지 고통스러워 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지만,그때의 나는 힘들어하고 또 힘들어 했었고,그 힘들어 했었다는 사실 자체가,내가 그 시절을 돌아보는 일을 자꾸만 막아서왔던 것이었다.그러나 문득 가보고 싶어졌고,어쩐지 가끔씩 보게 되는 남도여행기 속 '푸짐한 남도의 식당'을 벌교읍내의 식당 간판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발견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정을 내리는 성향만 없었다고 하더라고,내 삶은 좀 더 반듯하게 구획될 수 있었을 것이다.)

 

벌교로 향하는 길들은 몰라보게 넓어지고 달라져 있었다.옛시절의 위험한 비포장 국도는 사라져버리고,시원하지만 어쩐지 황량한 느낌을 주는 아스팔트 도로들이 벌교로 향하는 길들의 낯설음을 상징해주고 있었다.가끔씩 나타나는 경찰의 과속방지용 무인카메라만 아니었더라면,이 낯설음이 내 두뇌 속을 나릇한 몽환 비슷한 어떤 물결로 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벌교 역시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당시의 어슴푸레한 기억과는 달리,새로 생긴 아파트들과 역시 새로 증축한 관공서 건물들이,벌교 읍내로 들어선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 왔다.나는 우선 자그만 벌교 읍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그러자 아련한 기억 속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건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내가 거래했던 은행인 농협,그때도 있었던 입원실을 갖춘 외과 병원,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 같은 벌교역 청사,여관과 여인숙이 줄지어 서 있었던 골목들..작은 기억의 편린들이 10년 이상의 세월을 뚫고 올라와,다시금 그러나 불규칙한 형태로 재조합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뇌의 신호는 위장의 절박한 요구에 의해서 충분히 제어될 수 있다.나는 아폴론님의 <고흥주유기>에 나오는 식당을 떠올리고,읍내를 다시 한 번 돌면서 식당의 간판들을 쳐다보기만 한다면,그 글에 나오는 식당을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이런 기억력에 대한 과다한 신뢰가 가져다준 결과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나는 이번엔 배고픔이 가져다준 몽환 때문에,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있게 되었는데 문득 100미터 정도 앞 쪽으로 어딘가 낯익어보이는 작은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시계탑이 가져다 준 여러가지 기억의 시억의 시리즈 중 하나는,내가 이 곳에 머물렀을 당시 일했던 병원이 저 시계탑 근처라는 것이었다.나는 무언가에 끌리듯 자동인형처럼 그 쪽으로 다가갔고,곧이어 당시 내가 일했던 병원이,이젠 병원이 아니고 초등학생들과 중학생들을 가르치는 보습학원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외벽의 색깔이 변했고 병원의 대문 색깔이 변했다.골목 쪽으로 서 있는 벽돌 벽에는 그때와는 다른 색깔의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 같았고,들락거리는 사람들은 그 때보다는 훨씬 어린 사람들이었다.

 

난 예전에 그랬듯 병원 앞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그러면서 병원 주위에,역시나 그 전에 이렇게 정신없이 멍청하게 서서 담배를 빼어물었던 곳곳의 장소들을 기억해냈다.병원 문 왼쪽의 허름한 슈퍼 옆 공중전화박스 -더러울 대로 더러워진 유리창을 그대로 간직한 그 '상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예의 그 시계탑,그리고 '홍교'가 있었다.

 

 

 

홍교.나는 이상한 감정에 젖어 그 오래된 다리를 쳐다보았다.보물 304호라는 300년 된 다리...다음은 이 오래된 다리에 대한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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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란 다리 밑이 무지개같이 반원형이 되도록 쌓은 다리를 말하며, 아치교·홍예교·무지개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현재 남아 있는 홍교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현재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라는 지명이 생겨났으며, 조선 영조 5년(1729)에 선암사의 한 스님이 돌다리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그후 영조 13년(1737) 다리를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로 만들어졌고, 1981∼1984년까지의 4년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무지개 모양을 한 다리밑의 천장 한 가운데 마다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돌출되어 아래를 향하도록 하였는데, 이는 물과 용의 관계에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용의 코끝에 풍경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소리가 울려퍼지도록 하였다고 한다. 다리가 놓여진 강에는 바닷물이 드나드는데, 썰물 때에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원래 다리의 규모는 폭 4m, 길이 80m에 이르렀을 것으로 보이며,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 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화려하고 거대한 모습 속에서도 단아한 멋을 풍기며, 웅대함과 함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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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나를 '문화재 관리국장'이라고 불렀었다.오래된 것들- 예를 들어 할아버지 댁에 있었던 일제시대 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벽시계 같은- 이나,오래된 유적들에 대한 내 이상한 집착을 그녀는 이해하고 비유했던 거였다.나는 당시 그녀를 바로 그런 오래된 유적처럼 관리해서 나의 문화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고 말이다.
 

 

 
그러나 추억이란,잠자는 병사들로 가득찬 병영처럼 조용하다.그리고 난 그 조용함을 조금도 건드리고 싶지 않다.그럼에도 난 그 다리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갔다.그리고
 
그 몇백 년 된 다리 위에,몇백 년 전의 사람들처럼  섰다.서서 또 담배를 피웠다.담배를 피우고 있는 시간 만큼 공허하고 한산한 순간은 없다.폐장의 공허를 매우려 담배연기를 또 한 번 들이마시지만, 그 유독한 무색 기체들은 기관지의 폐포들을 더 세밀한 허탈함과 더 확장된 외로움으로 가득 채울 뿐이다.그래서 담배는 언제나 무익하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난 외로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난 그저 과거의 기억과 배고픔과 멍한 기분으로 뒤엉켜서 다리 위에 서 있을 뿐이다.물이 많이 빠져버린 강물과 바닷물이 뒤섞인 홍교 다리 밑으로 새 한 마리가 서 있었다.새는 나처럼 목표 없이 서 있는 게 아니었다.아니,새는 움직인다.기다랗고 유연한 목을 천천히 앞으로 구부리고는,그 목과 다리를 긴밀하게 교차시키며 물 속의 어느 불운한 목적물을 향해 온갖 집중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갯벌이 섞여 있는 강바닥에 박혀 있는 가느다란 다리를 신중하게 들어올리며,새는 목표물을 향해 신중하게,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접근하고 있다.
 
그 때 휴대폰이 울린다.아내다.아내는 내 소재를 묻는다.벌교라는 대답에,그게 어디냐는 뜨악한 대꾸가 돌아온다.나는 이준익의 영화 <황산벌>을 말하며,거기서 이문식이 연기한 배역 '거시기'의 고향이 벌교라고 대답한다.아내는 잠시 침묵하더니 자신의 용건을 말한다.자신이 나를 위해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놓았으니 어서 집에 돌아와서 먹으라는 거다.(자신의 정성을 배려하는 의미에서,집에 돌아오는 시점에는 꼭 공복상태여야 한다는 협박이 뒤따랐다)
 
잠시 난감했으나,나는 곧바로 벌교의 식당을 포기한다.왜였을까?
새도 날아가 버렸다.
 
나는 여전히 홍교 위에 서서 ,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벌교의 모습을 돌아본다.
 
순간적인 의문에 잠겼다.왜 나는 이곳을 여행지로 선택했던 것일까? 무엇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과거 어떤 시간들에 대한 기억이? 혹은 그 시간의 고통이? 아님 고통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달콤한 유혹이?
 
그런 의문에 대해 세세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다만,나는 내가 '보수적인'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는다.여기서 말하는 보수란 물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보수'는 아니다.그저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말할 뿐이다.오래된 시간들에 대한 기억력,아름다웠던 시절들,혹은 그 반대 시간들 조차도 되살리고 싶은 작고 소용없는 욕망과 지향들을 가리킬 뿐이다.
 
꼭 시간들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건물들,숲,강,또 사람들에 대한 느낌일 수도 있다.꼭 로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은 아니지만,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대운하'는 보수의 반대편에 있고,'새만금'은 거지 같은 진보다.또 어쩌면 보수나 진보는 그저 레토릭에 불과할 수도 있겠다.중요한 건 아무래도 '옳고 그름'일 것이며 그 옳고 그름의 잣대는 사안의 결과가 누구를 위해 복무하는 가이다.
 
비록 나의 보수야말로 퇴행적이고 비현실적인 몸짓에 불과하겠지만,우리 사회의 시간들에 대한 개념이 아름다운 보수와 아름다운 옳음으로 흘러서,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 마저도 소용없게 만드는 '착한 마을의 시대'가 왔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을 넘어서며,옳고 그름에 대한 표지판 기능을 하는 것이다.서울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물체에서 청계천의 촛불들을 바라본다고 생각해보라.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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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그런데,문득 또다시 찾아볼 사적인 장소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그러나 이번엔 진짜로 그 장소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 어렵다.만약 마음 속 나침반이 제대로 기능한다면,그 곳을 찾게 될 거라고 ,반쯤은 체념하며 나는 상상한다.그리고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러나 내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아내가 기다린다.그리고 결정적으로 배도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