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벽장 속의 친구들에게....
폴사이먼
2002. 3. 25. 00:07
단 하나의 장면이나 단 한 마디의 대사로써 뇌리에 각인되는 영화가 있다.평단의 평가나 대중들의 열광과는 무관하게 그런 영화는 '나만의 컬트'로서 마음 속에 자리하게 된다.오늘 내가 얘기할 프랑스 영화 '암흑가의 세 사람'이 바로 내겐 그러한 영화일 것이다.
이 영화는 1970년 쟝 피에르 멜빌이 연출하고,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명의 남자 배우 알랭 들롱과 이브 몽땅이 주연한 영화이다.원 제목은 Le Cercle Rouge, 영어로는 The Red Circle,우리 말로는 붉은 원 또는 적색 순환이라는 뜻이 되겠지만,'암흑가의 세 사람'이라는 한국식 제목도 어느 정도 그럴 듯 하다.그러나 '암흑가의 세 사람'이라는 갱(gang)냄새 물씬 풍기는 제목은,원래 제목에 숨어 있는 불교적인 뉘앙스를 완전히 덮어버렸고,그나마 개봉될 당시에는 '영원한 순환'
이라는 주제가 얼핏 드러나는 도입부의 나레이션 마저
삭제되어서 더욱 더 어설퍼졌다.그래서 결국 이 영화는 한국 땅으로 건너와 완벽한 갱 영화가 되었다.
그러나 상관 없다.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영화의 어떤 장면,그리고 어떤 대사이기 때문이다.
자,영화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
감독 쟝 피에르 멜빌은 1940 - 1950 년대의 헐리우드
갱스터 무비에서 깊은 영화를 받았으나,그것을 복사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프랑스 식의 냉정함,이성적임,그리고 사실성을 가미하여 자신만의 갱스터 무비를 만들어냈고,이 영화가 바로 그의 대표작이다.주연 배우들의 면면 역시 화려하다.어디에 갖다 놓아도 자신의 몫을 해내는 공인된 미남자 알랭 들롱과,프랑스의 연인이라 불리운 이브 몽땅의 사색적인 분위기는 영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나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영화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프로페셔널 전과자들이 모여서 보석상을 턴다는 설정부터가 그렇다.보스에게 배신당한 알랭 들롱이 출소 직전 간수에게 정보를 얻어 역시 호송 중 탈주한 죄수 지안 마리아 블론테와 합류하며,거기에 비리경찰로 강제퇴직 당한 명사수 이브 몽땅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보석상을 강탈하는 데에 성공하지만,그들을 뒤쫓는 끈질긴 형사반장 보르빌의 추격으로 모두들 총에 맞아 사망한다는 얘기이다.
익숙한 내용이다.어디서 많이 본 듯한 스토리이다.굳이 최근 영화를 예로 들자면 오션스 일레븐에 공공의 적을 합친 듯한 전말이다.화끈한 액션 장면도 없고 정교한 두뇌 게임도 없다.형사반장은 범죄자 못지 않은 술수를 꾸미고 협박과 거짓을 아끼지 않는다.정의의 사도는 아니라는 뜻이다.그렇다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큼 인상깊거나,아니면 반대로 전형적이지도 않다.한 마디로 '명화'의 반열에 올라가기에는 함량이 부족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무엇보다 차갑다.긴장감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인물들은 감정을 적절하게 드러낸다.오버하지 않는다.형사든 강도든 자신의 본래 역할에 충실하고 영화는 그 상황을 한 치의 여과도 없이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놓는다.그러면서도 상황 자체의 박진감을 놓쳐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
가령 세 사람의 강도가 보석상에 잠입하여 보석들을 탈취하는 수 분 간의 장면을 보자.
그들에겐 몇 가지의 핸디캡이 있다.
먼저,시간에 쫓긴다.그리고 보안 장치를 풀기 위해서는 정교한 사격 솜씨가 필요하다.이브 몽땅이 스스로 제조한 납 총알을 조준하여 몇 센티도 안 되는 보안장치의 과녁을 명중시키지 못하면,그들의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그런데 그 아슬아슬한 장면엔 그 어떤 사족도 첨부되지 않는다.사족이라.. 좀 이상한 표현이다.말하자면 긴장감을 더해주는 긴박한 음악이나
음향 효과,색다른 조명,배우들의 긴장어린 눈빛,주고 받는 불안감 어린 대사 따위는 도통 끼어들 구석 조차
없다 이런 뜻이다.
오히려 모든 작업은 철저한 침묵 속에 진행된다.창문을 뜯고 보석가게 안으로 잠입하는 장면도,보석들을 쓸어 담는 장면도,그 후의 도주도 모두 절체절명의 조용함 속에 진행된다.관객은 마치 실제의 강도 장면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간간이 들려오는 작은 소음들은 관객 자신이 내는 소음 보다도 작다.환한 불빛,넓은 실내에서 복면을 쓴 세 남자가 벌이는 강도 행각은 마치 팬터마임 연극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관객에게 짧은 스릴을 선사해주는 일 역시 잊지 않는다.예를 들어 이브 몽땅이 천재적인 사격
솜씨로 경보 장치를 부수는 장면.
그는 올림픽 사격선수처럼 사대를 설치하고 과녁을 조준한다.복면에 가리워진 그의 표정이나 다른 동료들의 표정을 관객은 읽을 수 없다.작업의 성패가 갈려지는 순간인데도 말이다.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다음 순간 갑자기 그는 사대 위의 총을 들어 선 채로 총알을 발사한다.더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택한 것이다.사격은 성공한다.관객도 그의 동료들도 잠깐 순간 깜짝 놀란다.그러나 그들에겐 오랫동안 놀라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다음 순간 그들은 이어진 연속 작업 (보석들을 재빨리 쓸어담는 일)에 몰두한다.무척 깨끗하고 쿨한 장면이다.
영화는 매양 이렇다.경찰의 추격 끝에 그들이 사살당하는 곳은 푸른 잔디가 촘촘히 깔린 언덕이다.어둡거나 으시시하지 않다.어떤 극적 감동도 없다.화려한 유언이나 불뿜는 총격전,그리고 액션도 없다.알랭 들롱은 비참하게 죽어가면서도 보석이 들어 있는 가방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으며,이브 몽땅은 '경찰은 항상 개자식들이야'라는 냉소를 남기며 숨을 거둔다.관객은
그들의 죽음을 아쉬워 할 수도 통쾌해 할 수도 없다.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형사반장이 그들의 죽음을 처리하는 장면도 얼핏 보면 매우 사무적이고,그 노련한 경찰관에게도 그를 의심하는 내사과 경찰들과 상관이 있다.
모두들 붉은 원 속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완수하며 톱니바퀴처럼 맞물려간다.
이것은 묘한 염세적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언젠가 어느 세대에서,형사반장이 강도들로 강도들이
경찰로 다시 태어날 것만 같다.그들의 죽음엔 아무 의미도 없으며,세상은 갱들의 비참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맑으며 여전히 깨끗하다.이렇게 세상은 영원히
돌아가는 수레바퀴 같다.
그러나 '암흑가의 세 사람'의 이러한 면이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 영화를 잊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하나의 장면,하나의 대사가 이 영화를 마음 속에 머무르게 했다.공교롭게도 둘 다 이브 몽땅이 등장하는 곳이다.
이브 몽땅이 분하는 얀센,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신기의 사격술을 가진 유능한 경찰이었지만,비리 혐의에 연루되어 강제퇴직 당한 후 마약에 젖어 사는 사람이다.그의 인생엔 어떤 희망도 없으며 마약으로 인한 환각만이 그의 유일한 비상구일 따름이다.
그런 그에게 알랭 들롱이 전화를 건다.
문제의 장면은 바로 그 전 장면,몽땅은 마약에 취해 환각에 사로잡힌다.
그는 침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그런데 방바닥과 침대 위는 시궁쥐들로 가득하다.쥐들은 벽장 속으로부터 쏟아져나와,몽땅의 침대 위에 깔린 담요 위로,
심지어 그의 몸 위로 올라가 있어,그 좁은 방 안을 완전히 자신들의 세상으로 만들고 있다.그 쥐들은 모르모트 류의 깨끗한 쥐들이 아니다.잿빛 털에 긴 수염을
가진 보기만 해도 지저분한 쥐들이다.쥐 특유의 민첩함도 없다.그들은 몽땅의 침대가 자신의 집이기라도 한 양,스멀스멀 느릿느릿 공간을 채우며 이동한다.몽땅은 두려움과 혐오에 질려 괴로워한다.그의 얼굴은 고통을 가득 찼고,입술은 비명이라도 지를 듯 씰룩거리지만 그의 목구멍에선 그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옥의 한 풍경 같다.갱스터 영화와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장면은,몇 백 년 전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쉬 (Hieronimus Bosch) 의 지옥도를 연상시킨다.보쉬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지옥을 표현한 종교화를 그려서 동시대 사람들에게 비밀스런 악마숭배조직의 일원이라고 오해 받은 사람이다.
세계에서 완전하게 차단된 구석방의 지저분한 침대 위에서,몽땅은 지옥 직전의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바로 그 때 들롱의 전화가 걸려 온다.몽땅은 온 몸을 떨며 전화를 받는다.그는 들롱에게 샤워하는 중이었다고
거짓말한다...
나의 장면,나의 마음 속 장면은 바로 이것이다.사실 배우들이 환각제에 취한 장면을 연기하는 것은 비단 이 장면 뿐만은 아니다.예를 들어 최근 한국 영화 '친구'에서 유오성이 연기한 필로폰 장면도 환각 장면이다.그러나 몽땅의 이 장면은 보쉬 그림의 지옥을 연상시키며 나의 감각 자체를 자극했다.왜일까? 내가 원래부터 쥐라는 동물을 싫어했던 탓일까? 아니면 거기서 그 어떤 고유의 '지옥'을 본 것일까...
결론을 잠깐 뒤로 미루자.몽땅의 한 마디 대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들롱의 조직에 가담하면서부터,몽땅의 외양은 급작스럽게 변한다.후줄근한 실내복을 걸친 채 괴로워하던 그는,멋진 트렌치 코트에 중절모를 쓴,매력적인 파리지엔,바로 원래의 '이브 몽땅'으로 변한다.변한 것은 외양만이 아니다.그는 노련하게 범행 장소를 탐색하고
작업에 쓰일 납 총탄을 제조할 때는 과학도적인 진지함을 과시한다.또한 그는 알랭 들롱에게 자신의 몫은 필요없다고 말한다.금전이 목표가 아닌 것이다.오직 자신의 작업에 최고의 프로페셔널리즘을 가진 채 몰두할 뿐이다.
결국 보석을 훔치는 데에는 성공하지만,모든 느와르 영화에서 그렇듯이,그들에겐 만만치 않은 상대편이 기다리고 있다.갖가지 협박과 술수,그리고 두뇌 회전으로 무장한 경찰에게 말려들어 그들은 모두 체포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알랭 들롱은 이브 몽땅에게 '아직 당신의 정체는 노출되지 않았으니 얼른 도망치라'고 권한다.그러나 이브 몽땅은 결연하게 그것을 거부한다.'친구'식의
의리나 조직에의 충성심이나 자존심 때문 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색다른 사정이 있다.이유를 묻는 들롱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네가 없었더라면,난 '벽장 속의 친구들'을 물리
치지 못했어!
이 수수께끼 같은 대사,이 대사 하나가 십 년이라는 세월을 관통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벽장 속의 친구들.그들은 누구인가?
바로 이브 몽땅의 환상 중에 나오는 쥐떼들이다.
그렇다면 이 쥐들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옥을 상징하는 전령들이다.
쥐들은 그의 영혼을 그들 특유의 앞니로 천천히 갉아먹어가는 일종의 파괴자들이다.그는 인생의 현실감을 잃었다.패배자로서,낙오자로서 낙인찍힌 채 그는 죽음처럼 무력한 삶을 살고 있었다.분명히 호흡은 하고 있으나 이미 시체와도 같아진 존재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정신적으로는 이미 자살해버린 상태인 것이다.그는
자신의 상황을 뼛 속 깊이 혐오하지만,그것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없다.
이 때 알랭 들롱과 그의 '작업'이 이브 몽땅 앞에 나타난 것이다.몽땅은 이 일이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는 사실을 안다.금전 따위의 보상은 아무 필요가 없다.자신의 영혼과 인간으로서의 자긍심,그리고 명예를 걸고 그는 보석상을 터는 것이다.이 일이 범죄
행위이냐 아니냐 하는 따위의 도덕 교과서 같은 생각도 그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다.그에겐 '살아 있다'는 사실,그가 속한 세계에서 '현실감'을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그에겐 목숨도 그리 중요해보이지 않는다.그는 그의 명사수로서의 존재감에 모든 것을 걸었고,그가 과녁을 궤뚫는 데에 성공했을 때,마침내 그는 '벽장 속의 친구들'을 물리쳐냈던 것이다.
내면의 존재,정신적 일체감을 위해 총을 든 범죄자.
이런 캐릭터는 어느 범죄 영화에서도 흔치 않다.
(그러나 최근 한국 영화들을 비교하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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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어느 때던지 우리는 완벽하게 무력해지는 어떤 기간을 겪는다.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상태,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상황,모든 일들이 제대로 풀려지지 않는 어떤 시간들을 만난다.더구나 그것이 어떤 내적 원인,특히 내면의 갈등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더욱이 고통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두려움 없이 싸워나가기란 너무 어렵다.도망칠 곳은 쌓이고 쌓였다.
나 역시 그랬다.
그 어느 때,난 심한 무력감과 권태에 사로잡혔었다.
방 밖으로 나가기 조차 싫었었다.
여기서 그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밝히는 일은 길고 힘든 일이다.
그 당시 난 집안에만 틀어박혀,힘들어하기만 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손가락질 하는 듯 했다.정신은 '벽장 속의 친구들'에게 갉아먹혀진 것처럼 황폐해졌었다.그 황폐함 속에서 나를 건져낸 것은 어떤 종류의 '액션'이었는데,이브 몽땅이 어깨에 총신을 걸고 납 총알을 발사하는 장면 처럼,그것은 돌발적이었고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난 그 '액션'후에 비로소 내가 감금된 방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벽장 속의 친구들'이란 우리들 고유의 어떤 고통이나 갈등이다.
다시금 그 친구들이 날 찾아오는 시기가 있을 지도 모른다.그러나 이번엔 그 친구들에게 미소를 머금고
'안녕 친구들, 또 왔나!'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벽장 속의 친구들'에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