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영화들/이백 편의 영화
When I was four and twenty... <Easy Rider>
폴사이먼
2002. 1. 16. 01:17
자유는 창녀가 되었고 우리는 그 창녀의
이지라이더가 되었다.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의 음울한 대사가 귓전에 메아리지는,헐리웃 영화의 새로운 황금기인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적인 영화 <이지라이더>가 오늘의 영화이다.
이지라이더란,'창녀의 늙은 기둥서방'이란 뜻의 미국
남부지방 속어로서,사라져가는 미국 젊은이들의 이상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가 나온 1969년은 월남전 참전의 음울한 기운과,
히피문화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반항이 어우러지는 미국 사회의 격렬한 혼란기였다.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직전의 미국이,가장 강력한 내부로부터의
역풍인 '젊은 반항'을 맞닥뜨렸던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반전데모와 평화운동과 록큰롤과 금지된 마약과 성해방을 통해 기존의 사회체제에 저항했으며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맞물려서 미국인들의 마지막 양심이 꿈틀거리던 때였다.
영화 역시,기존의 헐리웃 영화 제작 관행에서 벗어나
그동안 금기시되던 성과 범죄와 마약과 록큰롤을 무기로 삼아 기성세대와의 충돌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이,기존의 질서가 자신의 부패한 체제를 굳건히 하고 그 썩은 물을 내부 깊숙히 스며들게 할 때 가장 격렬하게 항의하는 이들은 젊은이들인 것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젊은 기수들은,기성세대의 눈으로는 가히 파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들을 유럽영화의 작가주의와 결합시켜 60년대의 격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지라이더>를 만든 데니스 호퍼와 피터 폰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만든 아서 펜.
<졸업>을 만든 마이크 니콜스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기존 사회에 반항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안티 히어로들을 전면에 내세워 정체해가는 미국영화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고,이 신선함을 이용하여
<천국의 문>과가 등장하는 1980 년대
초까지 미국의 영화는 가장 역동적인 시대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이후의 상황,즉 레이건 시대 이후의 상황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나는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언젠가 내가 이 칼럼에 썼던 <아비정전>을 떠올렸다.그 때 나는 아비정전을 '영원한 스무 살의 느낌'이라고 표현했었는데,과연 <이지라이더>는 몇 살의 느낌일까? 갑자기 이런 엉뚱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보는 영화마다 나이를 매기려 드는 내가 조금은 우스워졌지만 말이다.
글쎄,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우선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보기로 하자.
주인공인 와트(피터 폰다) 와 빌리(데니스 호퍼)는
'Jesus'라는 이름의 마약상에게서 공급받은 헤로인을
되팔아 미국대륙 여행비를 마련한다.그들은 마이크라는 이름의 커다란 오토바이에 올라타,뉴올리언즈로의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들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기 짝이 없다.장발에
마리화나,성조기가 그려진 가죽 재킷으로 무장한 그들은,그저 무작정 미국을 횡단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여행 도중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과정이다.
먼저 그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황무지를 개간했다는 농부를 만나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다.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기도로 시작하는
그 식사시간이 그들에겐 어색하기만 하다.그들은 그 일상적 식사모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처음부터 조짐이 이상하다.
다음 날 그들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숙박하려던 모텔 주인으로부터 쫓겨난다.빌리는 투덜거리지만 와트는 조용하다.이번에 그들은 히치하이커인 히피를 만나
사랑과 평화를 그 모토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방문하지만 그 곳에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다.그들의 목적지는 뉴올리안즈이며 그들의 '미국 찾기'가 여기서 멈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은 점점 심해져간다.급기야 '수상쩍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주정뱅이 변호사 조지 핸슨 (잭 니콜슨) 을 만나게 된다.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핸슨의 도움으로 그들은 유치장을 빠져나오게 되고,핸슨은 그들의 여행에 합류한다.핸슨은 변호사로서 이미 기성세대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이지만,그것을 견딜 수 없어 술에 젖어사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들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이미 자유를 상실하고 기존의 질서에 얽매어 있는 이들이,자신들과 비교하여 무언가 다르고 무언가 엇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무조건 경원시하는 것이라고...
실제로 이들의 자유로움은,어느 마을의 스낵바에서 마주친 십대의 여학생들에겐 동경과 공감을 품게 하지만,같은 스낵바의 백인 중년 남성들과 경관들에겐 적의와 증오심만을 갖게 한다.그리고 그 날 저녁,결국 그들의 습격을 받아 핸슨이 사망한다.
경악과 혼란에 빠진 와트와 빌리는 '마담 틴커토이의 집'에서 마약과 성에 탐닉하게 되고.다음 날 교회의 공동묘지 ( 미국의 기독교는 죽었다? )에서 메리와
카렌이라는 창녀들과 함께 마리화나와 필 (환각제)에 젖어 섹스를 나누게 된다.
이 장면은 초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려지며,환각에 젖은 와트는 비통함과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난 그들은 한적한 시골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타고 가던 농부들에게 살해당한다.역시
'머리가 길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다.
뒤집혀 불타오르는 그들의 오토바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암울하게 미국의 들판 하늘을 뒤덮으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사회의 (대중의) 반발에 부딪치는 자유로움은 이렇토록 처절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걸까?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의 문턱에 서 있던 당시 미국에서,그 체제에 생리적인 반항을 느꼈던 젊은이들은 모두 이렇게 좌절했던 것일까?
그리고 영화사에 오래도록 남은 이 마지막 장면은,미국 청년문화의 시작과 종언을 동시에 예언한 흉조를 알리는 부적 같은 것이었을까?
지금의 미국사회,'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미국인들을
바라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최초의 의문,
이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적어도 내겐,두 말 할 것도 없이 청춘의 나이 '스물 넷'이다.(물론 평균적인 한국의 남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거쳐야하므로 정확한 나이는 상향조정되어야 할 것이나 지구상의 반은 여성들인 것이다..)
이 나이에 다다르면 기성의 가치관과 기존의 질서가 무차별하게 개인을 덮친다.근본적인 일탈이나 엇나감은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천재가 아닌 다음에야,개인은 자기자신을 사회 속의 무리들에게 맞추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젊음은 항상 확실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
만의 주파수 자신 만의 문화를 고집하려 한다.젊은 그들은 그러한 자산을 마음껏 드러내려 하고 기존의 보수성은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은 집단과 현실적으로 맞부딪친다.더구나
사회적인 혼란기 때라면,이러한 갈등은 더욱 더 첨예하게 두드러진다.
바로 이 영화가 놓인 시점이 그러하다.와트와 빌리의
모든 것을,기성세대들은 증오하고 혐오한다.가장 사소한 것들,머리칼과 장신구 오토바이에마저도 사람들은 이를 갈며 적대감을 드러낸다.어쩌면 사소한 것일수록
더하다.
영화 속의 와트와 빌리는 최종적으로 패배한다.아니,구체적으로 살해당한다.또 환각과 약물로 도피한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죽었고 '영화 속에서'도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스크린 속에서 불타오르는 오토바이 '마이크'와 미국 남부 고속도로에서 시체로 변해 널부러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관객은 과거 자신의 열정을,그리고 현재의 갈등을,스물 넷 시절에 가졌던 세상에 대한 혐오감을,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는 것이다...
패배감의 한가운데에서 역전을 향한 새로운 기운이 솟아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이러한 저항의 개념은 몹시도 모호하다.그리고 다분히 미국적이다.동양적 의미의 내적 정신적 공간 과는 거리가 멀다.정치적인 억압을 경험했던 한국의 젊은이들로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횡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그리고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너무 좁다.게다가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자유에 대한 갈구'라고 치부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고,영화 속의 그들이 그런 것들을 진지하게 추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모습 자체로서 일종의 '이질적인 것들'을,'무언가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들'을,'기존의 것들에 대한 반대적인 것'들을 표상한다.능동적인 자유로움이라기 보다는
반항 그 자체다.
그러나 바로 이것,
방황과
아웃사이더적인 술렁임,
그리고 거부감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웅변한
다.
스물 넷..
우리는 이 때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한다.
용기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발달된 두뇌에서 나온 화려한 이론만 가지고서도 안
된다.
사회적 상황이나 계급적 위치만 가지고서도 불가능하
다.
젊음엔,또는 젊은 삶을 - 정착하지 않는 방랑과 솔직한 탐구로 어우러지는 - 선택하는 데에는 무언가 본능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록 깨어지고 다치고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 -
오랜만에 글을 올리며 무척이나 오버했다.무슨 소릴 써놓았는 지도 잘 모르겠다.처음엔,내게 중요했던 어떤 선택의 시기를 다루려고 했던 것인데,얘기가 의도와는 다르게 '젊음'이니 '반항'이니 하는 문제로 흘러버렸다.진짜 젊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다만 오늘 <이지라이더>를 다시 보면서,몇 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다.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2년 후,나는 내 상황과 밥벌이와 경쟁과 계속되는 시험에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빠져들었었다.참고 참던 생활에 짜증이 난 어느 날,그 어떤 예고도 없이 사표를 던지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난 <이지라이더> 들처럼 (단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륙횡단 고속도로를 달려가게 되었는데,수 시간을 달려가도 지나가는 차 조차 몇 대 밖에 되지 않았던 그 황량하고 무더운 도로 위에서,나는
대강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 어떤 실종도 자유는 아니다.. 라고.



이지라이더가 되었다.
주인공 캡틴 아메리카의 음울한 대사가 귓전에 메아리지는,헐리웃 영화의 새로운 황금기인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적인 영화 <이지라이더>가 오늘의 영화이다.
이지라이더란,'창녀의 늙은 기둥서방'이란 뜻의 미국
남부지방 속어로서,사라져가는 미국 젊은이들의 이상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영화가 나온 1969년은 월남전 참전의 음울한 기운과,
히피문화로 상징되는 젊은이들의 반항이 어우러지는 미국 사회의 격렬한 혼란기였다.고도의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기 직전의 미국이,가장 강력한 내부로부터의
역풍인 '젊은 반항'을 맞닥뜨렸던 시기이기도 했다.
젊은이들은 반전데모와 평화운동과 록큰롤과 금지된 마약과 성해방을 통해 기존의 사회체제에 저항했으며 흑인들의 민권운동과 맞물려서 미국인들의 마지막 양심이 꿈틀거리던 때였다.
영화 역시,기존의 헐리웃 영화 제작 관행에서 벗어나
그동안 금기시되던 성과 범죄와 마약과 록큰롤을 무기로 삼아 기성세대와의 충돌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회에서 그렇듯이,기존의 질서가 자신의 부패한 체제를 굳건히 하고 그 썩은 물을 내부 깊숙히 스며들게 할 때 가장 격렬하게 항의하는 이들은 젊은이들인 것이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젊은 기수들은,기성세대의 눈으로는 가히 파격적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소재들을 유럽영화의 작가주의와 결합시켜 60년대의 격동의 일익을 담당했다.
<이지라이더>를 만든 데니스 호퍼와 피터 폰다.
<보니와 클라이드>를 만든 아서 펜.
<졸업>을 만든 마이크 니콜스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모두,기존 사회에 반항하고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안티 히어로들을 전면에 내세워 정체해가는 미국영화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고,이 신선함을 이용하여
<천국의 문>과
초까지 미국의 영화는 가장 역동적인 시대를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 이후의 상황,즉 레이건 시대 이후의 상황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나는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문득 언젠가 내가 이 칼럼에 썼던 <아비정전>을 떠올렸다.그 때 나는 아비정전을 '영원한 스무 살의 느낌'이라고 표현했었는데,과연 <이지라이더>는 몇 살의 느낌일까? 갑자기 이런 엉뚱한 의문을 가지게 됐다.보는 영화마다 나이를 매기려 드는 내가 조금은 우스워졌지만 말이다.
글쎄,쉽게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우선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보기로 하자.
주인공인 와트(피터 폰다) 와 빌리(데니스 호퍼)는
'Jesus'라는 이름의 마약상에게서 공급받은 헤로인을
되팔아 미국대륙 여행비를 마련한다.그들은 마이크라는 이름의 커다란 오토바이에 올라타,뉴올리언즈로의 여행을 계획하지만 그들이 왜 그래야만 하는지,그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기 짝이 없다.장발에
마리화나,성조기가 그려진 가죽 재킷으로 무장한 그들은,그저 무작정 미국을 횡단하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여행 도중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과정이다.
먼저 그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황무지를 개간했다는 농부를 만나 그의 가족들과 함께 식사한다.그러나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기도로 시작하는
그 식사시간이 그들에겐 어색하기만 하다.그들은 그 일상적 식사모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처음부터 조짐이 이상하다.
다음 날 그들은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숙박하려던 모텔 주인으로부터 쫓겨난다.빌리는 투덜거리지만 와트는 조용하다.이번에 그들은 히치하이커인 히피를 만나
사랑과 평화를 그 모토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방문하지만 그 곳에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다.그들의 목적지는 뉴올리안즈이며 그들의 '미국 찾기'가 여기서 멈춰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배척은 점점 심해져간다.급기야 '수상쩍어 보인다'는 단순한 이유로 유치장에 갇히게 되고 거기서 주정뱅이 변호사 조지 핸슨 (잭 니콜슨) 을 만나게 된다.이 영화의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핸슨의 도움으로 그들은 유치장을 빠져나오게 되고,핸슨은 그들의 여행에 합류한다.핸슨은 변호사로서 이미 기성세대에 소속되어 있는 인물이지만,그것을 견딜 수 없어 술에 젖어사는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을 싫어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희들의 자유로움 때문이라고...
이미 자유를 상실하고 기존의 질서에 얽매어 있는 이들이,자신들과 비교하여 무언가 다르고 무언가 엇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면 무조건 적대시하고 무조건 경원시하는 것이라고...
실제로 이들의 자유로움은,어느 마을의 스낵바에서 마주친 십대의 여학생들에겐 동경과 공감을 품게 하지만,같은 스낵바의 백인 중년 남성들과 경관들에겐 적의와 증오심만을 갖게 한다.그리고 그 날 저녁,결국 그들의 습격을 받아 핸슨이 사망한다.
경악과 혼란에 빠진 와트와 빌리는 '마담 틴커토이의 집'에서 마약과 성에 탐닉하게 되고.다음 날 교회의 공동묘지 ( 미국의 기독교는 죽었다? )에서 메리와
카렌이라는 창녀들과 함께 마리화나와 필 (환각제)에 젖어 섹스를 나누게 된다.
이 장면은 초현실적인 감각을 가지고 그려지며,환각에 젖은 와트는 비통함과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다시 여행을 떠난 그들은 한적한 시골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타고 가던 농부들에게 살해당한다.역시
'머리가 길어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다.
뒤집혀 불타오르는 그들의 오토바이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암울하게 미국의 들판 하늘을 뒤덮으며 영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런데,
사회의 (대중의) 반발에 부딪치는 자유로움은 이렇토록 처절하게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걸까?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의 문턱에 서 있던 당시 미국에서,그 체제에 생리적인 반항을 느꼈던 젊은이들은 모두 이렇게 좌절했던 것일까?
그리고 영화사에 오래도록 남은 이 마지막 장면은,미국 청년문화의 시작과 종언을 동시에 예언한 흉조를 알리는 부적 같은 것이었을까?
지금의 미국사회,'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 아래,약소국 아프가니스탄을 여지없이 깨부수는 미국인들을
바라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최초의 의문,
이 영화의 나이는 몇 살인가..
여러분이라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적어도 내겐,두 말 할 것도 없이 청춘의 나이 '스물 넷'이다.(물론 평균적인 한국의 남자들은 국방의 의무를 거쳐야하므로 정확한 나이는 상향조정되어야 할 것이나 지구상의 반은 여성들인 것이다..)
이 나이에 다다르면 기성의 가치관과 기존의 질서가 무차별하게 개인을 덮친다.근본적인 일탈이나 엇나감은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천재가 아닌 다음에야,개인은 자기자신을 사회 속의 무리들에게 맞추어나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젊음은 항상 확실한 개성을 가지고 있고 자신
만의 주파수 자신 만의 문화를 고집하려 한다.젊은 그들은 그러한 자산을 마음껏 드러내려 하고 기존의 보수성은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게 개인은 집단과 현실적으로 맞부딪친다.더구나
사회적인 혼란기 때라면,이러한 갈등은 더욱 더 첨예하게 두드러진다.
바로 이 영화가 놓인 시점이 그러하다.와트와 빌리의
모든 것을,기성세대들은 증오하고 혐오한다.가장 사소한 것들,머리칼과 장신구 오토바이에마저도 사람들은 이를 갈며 적대감을 드러낸다.어쩌면 사소한 것일수록
더하다.
영화 속의 와트와 빌리는 최종적으로 패배한다.아니,구체적으로 살해당한다.또 환각과 약물로 도피한다.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죽었고 '영화 속에서'도주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안된다.스크린 속에서 불타오르는 오토바이 '마이크'와 미국 남부 고속도로에서 시체로 변해 널부러져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관객은 과거 자신의 열정을,그리고 현재의 갈등을,스물 넷 시절에 가졌던 세상에 대한 혐오감을,
그 자유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는 것이다...
패배감의 한가운데에서 역전을 향한 새로운 기운이 솟아올라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자유,이러한 저항의 개념은 몹시도 모호하다.그리고 다분히 미국적이다.동양적 의미의 내적 정신적 공간 과는 거리가 멀다.정치적인 억압을 경험했던 한국의 젊은이들로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을 횡단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그리고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너무 좁다.게다가 이 영화의 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자유에 대한 갈구'라고 치부하기엔 다소 무리가 따르고,영화 속의 그들이 그런 것들을 진지하게 추구한다고 보기도 어렵다.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모습 자체로서 일종의 '이질적인 것들'을,'무언가 불편함을 일으키는 것들'을,'기존의 것들에 대한 반대적인 것'들을 표상한다.능동적인 자유로움이라기 보다는
반항 그 자체다.
그러나 바로 이것,
방황과
아웃사이더적인 술렁임,
그리고 거부감
그 모습만으로도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웅변한
다.
스물 넷..
우리는 이 때 '이것 아니면 저것'을 선택한다.
용기만 가지고서는 안된다.
발달된 두뇌에서 나온 화려한 이론만 가지고서도 안
된다.
사회적 상황이나 계급적 위치만 가지고서도 불가능하
다.
젊음엔,또는 젊은 삶을 - 정착하지 않는 방랑과 솔직한 탐구로 어우러지는 - 선택하는 데에는 무언가 본능적인 것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록 깨어지고 다치고 죽게 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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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올리며 무척이나 오버했다.무슨 소릴 써놓았는 지도 잘 모르겠다.처음엔,내게 중요했던 어떤 선택의 시기를 다루려고 했던 것인데,얘기가 의도와는 다르게 '젊음'이니 '반항'이니 하는 문제로 흘러버렸다.진짜 젊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다만 오늘 <이지라이더>를 다시 보면서,몇 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났을 뿐이다.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2년 후,나는 내 상황과 밥벌이와 경쟁과 계속되는 시험에 견딜 수 없는 혐오감에 빠져들었었다.참고 참던 생활에 짜증이 난 어느 날,그 어떤 예고도 없이 사표를 던지고 우리나라를 떠나버렸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난 <이지라이더> 들처럼 (단 오토바이가 아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륙횡단 고속도로를 달려가게 되었는데,수 시간을 달려가도 지나가는 차 조차 몇 대 밖에 되지 않았던 그 황량하고 무더운 도로 위에서,나는
대강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 어떤 실종도 자유는 아니다.. 라고.


